이 사회의 차별과 폭력의 구조는 매우 강고해서, 언어는 물론이고 다른 무엇으로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 같을 절망스러운 순간이 계속 반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때로 우리는 처음 배운 새로운 말로 얼기설기 짜본 이야기로 상심해 있는 서로와 새롭게 연결된다. 그렇게 이어진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고 다양한 몸들과 소통하고 이 사회 속에 모두를 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오늘도 조금씩 세상에 퍼트려 나갈 것이다. (본문 중)

박은영(작가)1)

 

일요일 오후, 아이들의 놀이방으로 사용하는 지하 방에 어른들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가운데 책상에는 몇 가지 간식과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2주 만에 모였지만, 미리 정한 분량을 다 읽어 오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책은 다 못 읽었지만 할 말은 수두룩해서 정해져 있는 시간이 끝나는 게 매번 아쉽다.

 

지난가을, 교인 몇 명이 모여서 장애학의 고전,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을 읽었다. 다니는 교회에서 주일 오후에 분기마다 열리는 7-8주 정도의 관심사별 모임이다. ‘다른 몸 책 읽기’라는 제목을 걸어두었지만, 누가 주일 오후에까지 책 따위를 읽고 싶을까 싶어 모임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래저래 5명이 모였기에 책 목록 몇 개 중에 같이 읽고 싶은 책을 고르자고 했다. 쉽고 재미있는 에세이 한두 개 읽고 수다를 많이 떨 계획이었던 내 기대와는 달리 교우들은 『거부당한 몸』을 읽자고 했다. “이 책 이론서라 좀 딱딱한데…….” 했더니, 이런 책은 같이 읽지 않으면 절대 안 읽는다며, 한번 읽어 보잔다.

 

그렇게 시작된 책 모임이었지만, 모임 때까지 정해진 분량을 다 읽어오는 사람은 드물었고, 어떤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어떤 부분에서는 아무도 저자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책의 내용을 시작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몸에 대해, 그리고 사회가 ‘정상’이라고 인정되지 않는 몸들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인지에 대해 한없이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의 수많은 사물과 질서, 구조는 매우 협소하게 규정된 ‘정상인’, 그중에서도 ‘비장애인 성인 남성’에게만 맞추어져 있다는 내용 하나에도 다들 덧붙일 말이 많았다. 한 교우는 최근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병원에 갔던 경험을 이야기해 줬다. “병원에 가려면 길을 건너야 하는데, 허리가 아프니까 파란 신호가 너무 짧은 거야. 어린아이나 장애인, 노인들이 그 시간 안에 길을 건너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싶더라고.”

 

나도 이야기를 덧붙였다. “모 병원은 3차 병원인데도, 휠체어 이용자가 탈 수 있는 셔틀버스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병원 이용자들 중에 휠체어 이용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말이에요.”

 

이야기는 또 이렇게 이어진다. “학교에서 가끔 선생님들이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사실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의 문제일 때도 많은 것 같아요. 적은 수의 선생님들이 많은 아이를 돌보는 데다 꼭 진도를 맞추려는 교육이다 보니, 조금 느리거나 약간 다른 아이조차 학교가 품고 가지 못하는 것 같아요.”

 

다들 장애나 질병이란 주제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며 시작한 모임인데,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며 달려가고 있는지 느낀 경험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수다를 떠는 자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말과 말이 이어져 이야기가 되는 자리다. 그 이야기들은 줏대 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것 같지만,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습관을 만들고 조절한다. 하지만 늘 하던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새로운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다.

 

주일 오후 모임에서 장애와 질병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쏟아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웬델의 책에서 언어를 배웠다.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문장을 이해하고 나자, 그로부터 우리의 경험이 새롭게 재해석되었고, 표현하기 힘들었던 감정과 느낌에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절대 술술 읽히지 않는 책이었지만, 웬델의 문장들은 매번 우리 모임의 수다 포문을 열어주었다. 그 문장들에 힘입어 우리는 허리가 아픈 나의 걸음이 아니라 신호의 길이가, 아이의 속도가 아니라 한국 교육의 속도가 문제라고, 비로소 불평을 터뜨릴 수 있었다.

 

모임 기간에 나는 두어 번 기독교 대학생들과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초대되었다. 사실 당시 20대들 사이에 전장연 시위에 대한 거부감이 높아졌다는 소문을 들어 괜히 긴장이 되었다. 모임 전에 받은 사전 질문에 전장연 시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도 있어서 더 그랬다.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전략을 짠 건 아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장애라는 주제를 접해볼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과 제일 먼저 나누어야 할 것은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이었다. 이야기는 사회가 얼마나 협소한 범위에 해당하는 몸에만 맞게 설계되어 있고 얼마나 많은 몸들을 아무런 고민 없이 배제해 왔는지, 그리고 그 사실이 얼마나 철저하게 은폐되어 왔는지 말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결국 ‘그다음은 어떻게든 되겠지. 대화는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라며, 계단과 경사로, 엘리베이터 같은 기본적인 이미지만 담은 피피티를 만들어 갔다.

 

학생들과 만나보니 역시 내 걱정은 호들갑스러운 기우에 불과했다. 내가 준비해간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은 “장애인 시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는데, 이제 그 운동을 지지할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 줬다. 그 말에서 나는 그들이 찾고 있던 것은 ‘귀찮은’ 시위가 사라지는 일상보다, 장애인 운동가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다고 느꼈다.

 

시간이 지나 웬델의 책을 마무리하던 날, 모임 멤버 한 명이 말했다.

“이젠 차별적인 상황에 조금은 더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언어와 논리가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며, 논리로 설득할 수 없는 상황들도 부지기수다. 이 사회의 차별과 폭력의 구조는 매우 강고해서, 언어는 물론이고 다른 무엇으로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 같을 절망스러운 순간이 계속 반복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때로 우리는 처음 배운 새로운 말로 얼기설기 짜본 이야기로 상심해 있는 서로와 새롭게 연결된다. 그렇게 이어진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고 다양한 몸들과 소통하고 이 사회 속에 모두를 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오늘도 조금씩 세상에 퍼트려 나갈 것이다. 세상도 창조했다는 말(씀)이니 그 힘을 조금은 더 믿어보기로 한다.

 


1)『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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