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고통을 만나면, 과거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인생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 가운데서 몸부림친다. 그러나 삶은 거기서 중단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대답과 고통의 해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삶에 떠밀려 삶을 살아가게 된다. 끝내 욥이 그랬듯, 원하든 원치 않든 일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살아 나간다.(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권지성 지음 | 『특강 욥기』

IVP | 2019년 6월 25일 | 366쪽 | 19,000원

 

두 가지 고통이 있다. 억울한 고통과 억울하지 않은 고통. 억울하지 않은 고통이라 하면 주로 고통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경우다. 사람들은 자초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억울해하지는 않는다. 반면 외부로 인한 고통에는 억울함이 따른다. 욥의 고통이 그렇다. (물론 많은 경우, 고통은 자신의 잘못과 외부의 요인이 겹치는 지점에서 발생하기에 손쉽게 둘로 나눌 수는 없다.)

 

많은 이가 욥기를 이야기할 때,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것만큼 욥기에서 중요한 것은 억울함이다. 욥만큼 억울한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욥보다 억울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친구들과의 논쟁 역시 이 ‘억울함’에 대한 입장 차이로 발생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 입장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억울할 것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욥에게 죄가 있고, 욥이 그 대가로 고통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보여 준다. 인과관계로 촘촘히 짜인 세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하나님. 여기에 부조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톱니바퀴가 빼곡히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욥은 여기에 동의할 수 없다. 그는 ‘가장 의로운 자’였다(욥 1:8). 그의 고통에는 이유가 없었다. 인과관계를 부수고 들이닥친 사건은 그의 신앙을 뿌리째 뽑아 버렸으며, 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경험한 것은 합리적 질서, 응보적 하나님을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욥에게 있어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는 지금 고장 난 상태다.”

 

이를 도식화해 보자면, 욥의 친구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도미노의 연쇄 같은 종적 차원으로, 욥은 그것을 부서뜨리면서 내리치는 횡적 차원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 욥은 이 양쪽의 차원 모두와 씨름하고 있다. 종적 차원을 강요하는 친구들과, 횡적 차원에서 침묵하는 하나님 사이에서 ‘고통하고’ 있다.1)

 

고착된 이 상황을 끝내는 길은 하나님이 입을 여는 것밖에 없고, 하나님은 욥기의 끝에 이르러서야 폭풍우 가운데서 발화하며 문제는 종결된다.

 

욥과 친구들, 다르지만 같은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는가? 그는 친구들을 꾸짖는다. “내가 너와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한 말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42:7).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비롯한 모든 것을 규칙과 신학에 끼워 넣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까지도 여기에 구겨 넣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친구들을 비판했다는 말은, 그가 욥에게 임의적이고 자유롭게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욥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도 비판한다. 욥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인식은 옳았으나, 종적 차원을 벗어난 하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인과관계 속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하나님을 그대로 두려 하지 않고, 이 상황을 수정하려고 했다.

 

결국 현실 인식은 달랐지만, 욥과 친구들은 모두 ‘하나님이라면 으레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자신의 전제를 품고 거기에 하나님을 집어넣으려 한 것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고통이라는 현상 속에서 하나님을 그들의 기계적인 이해 수준에서 한정 지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물로는 결코 하나님을 포획할 수 없다. 그들이 가진 신학은 하나님에게 너무나 비좁은 것이다.

 

『특강 욥기』표지, ⓒIVP

 

욥의 회개?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욥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근거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욥은 “여호와의 힘과 세상의 설계를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의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통의 이유를 끝내 알지 못했고, 자신의 무능과 무지만 여호와께 추궁당했다.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본다는 이 고백(42:5)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만남을 통한 화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여호와를 이길 수 없다는 체념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는 구절(42:6)도 “‘티끌과 재로 돌아갈 인간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위로한다’로 보아야 한다. 이제 하나님께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욥은 스스로의 상황에 만족해야 한다.”

 

그렇다면 욥의 말년 역시 회개 후 하나님의 축복을 얻은 해피엔딩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대로 해결 없이 끝나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결말이 가장 사실적인 것 같다.

 

이유 없는 고통을 만나면, 과거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인생과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 가운데서 몸부림친다. 그러나 삶은 거기서 중단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대답과 고통의 해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사람은 삶에 떠밀려 삶을 살아가게 된다. 끝내 욥이 그랬듯, 원하든 원치 않든 일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살아 나간다. 물론 고통은 언제까지나 거대한 상처로 남아 있겠지만 사소한 것들에 감격하고, 때로는 웃으며 삶을 이어 간다.

 

욥기의 신학

 

저자는 서문에서 신학의 위기를 논한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병명, 즉 위기의 근원은 신학의 부재이다.” 그러나 욥기는 신학으로 가득 차 있다. 오히려 신학의 과잉이 욥기가 시사하는 문제이지 않은가? 신학을 줄줄 외는 친구들을 통해 신학 무용론만 확인하게 되지 않는가?

 

욥기에는 꽉 막힌 신학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 있다. 바로 욥이라는 “거센 바람”이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8:2). 소발의 이 말은 비난이지만 정확하다. 욥의 말은 광풍이다. 그것은 기존의 고리타분한 “책상 신학”을 세차게 흔든다.

 

이 거센 바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폭풍우’로 이어진다. 거센 바람 같은 욥의 신학마저도 으깨 버리는 신학의 파괴적 가능성. 이것이 교회에 부재하는, 그렇기 때문에 회복해야 하는 신학이 아닐까. 설령 그것이 불가해하고, 납득할 수 없고, 우리의 기반을 모조리 날려 버릴지라도 말이다.

 


1)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수록된 “호모 파티엔스(homo patience)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제목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고통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해내기도 한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인생의 비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전에는 없는 동사인 ‘고통하다’를 발명해[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설명에 비추어 본다면, 욥 역시 ‘고통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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