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필자는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그의 근본정신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필자는 켈러의 근본정신을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중’, 그리고 ‘문화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라고 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켈러의 삶과 사역에서 드러나는 근본정신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세상에 잘 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본문 중)

김상일1)

 

팀 켈러 목사의 사망 소식을 보스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들었다. 그리고 비행기가 보스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쉴 새 없이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지인들로부터 온 것들이었다. 필자가 팀 켈러 목사를 너무도 좋아했고, 또 그의 신학적 비전을 다룬 책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2020)도 썼기에 여러 선‧후배와 지인이 켈러 목사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2023년 5월 19일, 팀 켈러 목사가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2006년 고든콘웰 신학교에 다니며 강의를 위해 방문했던 팀 켈러를 처음 만난 지 17년 만이었다. 그 17년 동안 켈러는 필자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율법과 행위 구원에 치여서 살던 필자에게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에 대해서 알려 주었고, 우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필자에게 우상이 어떻게 인간 마음에 파고들어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역사하는지 눈 뜨게 해주었으며, 상황화를 복음에 대한 타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필자에게 복음은 항상 상황보다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항상 (과하건, 부족하건, 혹은 적합하건 간에) 상황화되므로 복음을 전하려는 개인과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적절히 상황화된 복음을 전할 수 있는지 항상 고민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주었다.

 

팀 켈러 목사가 떠난 지 두 달 남짓 지난 지금, 여러 교회와 기관, 학자와 목회자들이 팀 켈러 목사의 신학적, 목회적 유산에 대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켈러 목사가 공동 창립자로 섬겼던 미국의 The Gospel Coalition을 비롯해서, 같은 기관의 한국 내 연계 단체인 TGC코리아를 통해서도 좋은 글과 강연들이 소개되고 있다.2) 아마 이런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 믿는다. 팀 켈러 목사 (이하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정리하는 가운데 한국의 교회들과 신자들이 그의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본받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면 좋겠다. 이 글도 그러한 소망을 담은, 켈러의 유산에 대해 함께 돌아보자는 한국 교회를 향한 요청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그의 근본정신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필자는 켈러의 근본정신을 ‘사람에 대한 사랑과 존중’, 그리고 ‘문화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라고 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켈러의 삶과 사역에서 드러나는 근본정신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세상에 잘 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켈러는 복음 메시지의 바탕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8-40)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음을 파악했고, 복음을 마치 상품을 팔듯이 혹은 기업이 홍보 전략을 펼치듯 전하는 대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재를 관계 안에서 연결과 소통을 통해 전해야 함을 보여 주었다. 만일 복음을 연결과 소통이 아닌 단절과 불통의 메시지로, 신자들이 죄로 가득 찬 세상과 철저히 분리되도록 요구하는 메시지로 이해한다면,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세상의 죄와 하나 되기까지 더럽혀지신 것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고후 5:21)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라는 복음의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켈러의 유산은 복음이 근본적으로 사랑의 메시지임을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더 잘 보게 해주고, 그 복음의 길을 따르도록 도와주는가.

 

끊어진 관계를 연결하고, 소통을 회복하는 복음

 

켈러는 자신의 사역이, 더 나아가 모든 신자에게 맡겨진 복음 사역이, 본질적으로 연결하고 소통하는 사역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복음이 하는 일이 깨어지고 끊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하고 그를 통해 막혀 있던 소통의 길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 이 같은 복음의 정신 속에서 켈러는 끊겼던 관계가 이어지고, 막혔던 소통이 회복되도록 하는 일에 자신의 사역을 집중하고자 했으며, 이런 점은 켈러가 강조했던 네 가지 사역 접점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

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를 통해서)

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

(팀 켈러, 『센터 처치』, 616.)

 

이 네 가지 사역 접점들은 복음이 하는 일에 대한 켈러의 통합적 이해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모든 사역 접점이 연결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괄호 안에는 그런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도 제시했다.

 

복음 사역에 대한 켈러의 이러한 통합적 이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 대답은 독자들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다만, 복음을 통해서 관계가 연결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이런 사역의 통합점을 켈러가 어떻게 자신의 사역에 녹여냈는지 추적해 본다면, 우리의 삶과 복음 사역의 지향점을 찾는 데 도움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켈러가 이런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해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켈러에게 큰 빚을 졌다. 그 빚을 갚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렇다면 켈러는 자신이 말하는 이런 연결과 소통이 어떻게 일어난다고 보았나? 켈러는 복음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밑바닥까지 모두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받아주시고 사랑하셨다는 소식이라 이해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연결과 소통이 일어나도록 이끄는 원동력임을 깨달았다. 이 글의 남은 부분에서 필자는 이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만약 그런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또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문화와 맺는 관계 또한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상관없이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어떤 문화든지 상관없이 인간의 선하고 악한 모습이 모두 담긴 총체적 현실이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한 사람과 문화에 대한 존중이 켈러의 복음 사역의 가장 큰 특징이다.

 

팀켈러 ⓒFrank Licorice_Flickr

 

사람 사랑의 메시지로서의 복음

 

복음이란 무엇인가. 켈러는 자신의 저서 중 한 권에서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허물과 죄가 너무 심각하여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의 값을 치러야 했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쁘게 십자가를 지실 만큼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며 귀한 존재라는 것 아닌가?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70.)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메시지이다. 팀 켈러가 복음을 정의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그 모든 허물과 죄를 다 보시고 알고 계심에도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누군가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그 관계는 깨어짐에서 연결로 옮겨 간다. 소통이 회복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와 관계를 맺어 주신다. 켈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부 관계에 빗대어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이편을 다 드러내지 않고 받는 사랑은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실상이 알려져 사랑받지 못하게 되는 사태는 더없이 두렵기만 하다. 반면 이편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고도 아낌없이 사랑을 받으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이런 사랑은 허울을 벗겨 주고, 독선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며, 삶이 어떤 어려움을 주든지 꿋꿋이 맞설 용기를 가져다준다.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125.)

 

만약 복음 사역이 깨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하고, 소통의 회복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그런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우리가 복음 사역을 감당하는 유일하고도 핵심적인 길은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이렇게 사랑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진 종교가 무엇이든, 경제적 상황, 정치적 입장, 인격이나 과거사, 학력 수준이 어떻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사랑해 주셨고, 지금도 사랑해 주심을 안다. 그렇다면 복음 사역이란, 먼저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경제적으로 수준 차이가 난다고,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인격이 안 좋기로 유명하다고, 과거사가 지저분하다고, 학력 수준이 떨어진다고, 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곤 한다. 그러나 복음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심지어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다. 누가 이웃인가.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다. 나와 다른 사람, 교회를 다니지 않고, 상처투성이에, 성격이 이상하고, 무당을 따라다니고, 정치적으로 극우나 극좌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어떤 차별할 이유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 질문이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그는 복음이 이런 소식이라는 것을 우리 시대에 다시 발견하게 해주었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바로 그 방식으로 다른 모든 이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일이며, 그렇게 그들을 사랑하는 일임을 보게 해주었다. 켈러는 복음을 믿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맨해튼의 한 회사에서 일하던 아가씨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파면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중대한 잘못이었지만 상사는 그러한 사실을 위에 알리지 않고 책임을 혼자 뒤집어썼다. 그 탓에 경력에도 흠집이 났고 조직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폭도 좁아졌다. 상사의 처신을 보면서 젊은 여직원은 무척 놀랐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자리에서, 아가씨는 공을 가로채는 상사는 여럿 보았지만 남의 허물을 대신 지는 경우는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었다. 상대는 몹시 쑥스러워하면서 대답을 피했지만, 이편에서 한사코 매달리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떠맡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닿는 데까지 남들의 짐을 지고 싶어 하는 겁니다.” (팀 켈러, 『일과 영성』, 271)

 

켈러가 모든 신자에게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랑을 깊이 새기면 새길수록,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그의 메시지이며, 그가 복음을 믿는 방식이다.

 

문화 사랑의 메시지로서의 복음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복음이 단절과 분리가 아닌, 연결과 소통을 지향함을 일깨워 준 것이다. 하나님은 연결하고 소통하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문화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결하고 소통해야 할까. 문화를 인간적인 것으로, 또 인간적인 것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한국의 기독교 문화 안에서, 문화와의 연결을 말하는 켈러의 주장은 이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켈러가 다음에서 비판하는 모습처럼, 한국 교회와 신자들이 일반 문화로부터 분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지난 80여 년간, 대중문화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외면’과 ‘이탈’에 가까웠다. 음악과 영화, 텔레비전을 싸잡아 위험스럽고, 정신을 더럽히며, 수준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치부했다. 회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쾌한 부분들을 잘라내 버리고 복음적인 색채를 지나치다 싶을 만큼 뚜렷하게 드러내는 음악, 영화, TV 쇼, 문학, 관광 안내 따위의 프로그램으로 채운 기독교 하위문화를 대안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세계관을 분별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소모하는 제3의 유형도 있다. 어째서 이처럼 대중문화를 외면하고 이탈하는 현상이 벌어지는가?…그렇게 문화적인 ‘텍스트’에서 몸을 빼내면 죄스럽다는 느낌이 덜 들지 모르지만 실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복잡하고 유기적인 죄의 속성은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도덕적인 순결, 재정적인 안정, 순수한 교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 따위의 긍정적인 요소들로부터 갖가지 우상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문화 전반에서 뒷걸음치는 걸 강조하다 보면 오히려 더 ‘점잖아 보이는’ 우상 숭배에 빠져들 가능성이 부쩍 높아진다. 그러므로 죄를 ‘우상을 만들려는 마음의 강박적 욕구’로 규정하는 ‘두터운’ 신학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무작정 도망치거나 무절제하게 소비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겸손하면서도 비판적인 자세로 문화에 참여할 수 있다. (팀 켈러, 『일과 영성』, 239-240.)

 

켈러는 문화로부터 무조건적인 분리와 단절에서 돌아서서 복음 사역의 지향점인 연결과 소통으로 향하려면, 죄를 규정하는 ‘두터운’ 신학적 시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반 문화는 무조건 정죄하고 기독교 문화는 무조건 좋은 것으로 보는 대신, 어떤 문화든 받아들일 만한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기독교 문화든 일반 문화든 배울 부분뿐 아니라 우상이 생길 여지도 함께 존재함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문화를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도 분별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문화들의 영감과 창작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화 안에 있는 정의와 지혜,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의 표현들을 경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갖고 이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특히 죄와 우상숭배로 인해 왜곡된 것들을 살펴야 한다. (팀 켈러, 『센터처치』, 232).

 

한국 교회는 점점 한국 사회 안에서 위축되고 있고 복음적인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문화가 가져다주는 영감과 창작을 즐기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한국 문화를 정죄하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문화로 간주하기 쉽다. 한국 기독교가 처한 이런 상황은 흥미롭게도 켈러가 사역했던 뉴욕 맨해튼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켈러는 뉴욕 맨해튼의 문화 안에 기독교적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문화의 영감과 창작을 즐겨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뉴욕 맨해튼은 미국 안에서도 종종 비기독교적이고 악한 것들이 집결한 곳으로 여겨지곤 한다. 특히 남부 지역에 사는 전통적 기독교인들은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교회는 켈러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한국 문화로부터의 분리하고 단절해야 할까. 무엇이 한국 교회가 믿는 복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길인 것일까? 켈러는 문화에 대한 존중이 사람에 대한 존중임을 잊지 않았다. 각 사람 안에 존중할 만한 것들과 분별하고 맞서야 할 것들이 있듯이, 문화 또한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켈러는 항상 존중과 공감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에 들어가 그 문화에 대해 확인하는 것을 멈추지 않도록 명심하라. 이것은 한 번 하고 지나가는 ‘단계’가 아니다. 언제나 존중과 공감을 표현하라. 문화에 맞서거나 비판할 때도 언제나 이렇게 말하라. “여러분들이 이에 대해 불편해할 것이라는 건 압니다만….” 당신이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주어라. 사람들이 비록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이슈에 대해서건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하라 (『센터 처치』, 264.)

 

존중과 공감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켈러의 주장이다. 관계가 이어지고 연결과 소통이 일어나려면, 한 번만 존중, 공감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존중과 공감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한다. 하나님도 우리의 모든 약점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랑해 주신다는 점을 기억하라. 켈러의 이런 유산은 복음으로 문화에 대안을 제시하기에 급급하다가 문화에 대한 존중을 놓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다.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 그리고 문화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다름 아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점을 기억하고 그 지식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다. 켈러는 복음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소식이기 때문에 그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연결과 소통을 추구하도록 이끌린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 급급한 나머지 그들의 인간성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말살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문화에 대한 편집증적 순결주의에 빠진 나머지 모든 문화 안에 하나님의 선한 것과 우상의 악한 것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지는 않는가? 켈러는 사람과 문화를 존중하고 사랑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고, 성령을 통해 지금도 열매 맺고 있는, 하나님 복음의 연결과 소통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팀 켈러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두 달여가 지난 지금,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 곧, 하나님의 연결과 소통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 연결과 소통을 향하여]』(기독교문서선교회, 2020)의 저자. 미국 Grace-Mission University 겸임 교수(실천신학).

2) 예를 들어, 김선일 신국원, “팀 켈러 이후 기독교 변증의 과제는 무엇인가?”, 복음과 도시, 2023. 7. 3. 고상섭,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1)-(8)”, 2023. 5. 29. – 7. 12.(편집자 주).

3) 많은 이들이 CCC의 유명한 전도 소책자 사영리(4 Spiritual Laws)도 복음 메시지의 핵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다시 연결됨을 강조하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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