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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1)>: 나는 누구, 여긴 어디?(홍종락)

 

<파인>이 보여주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일부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세계를 뉴스에서 보고 이야기로 들었으며, 강도와 빈도는 덜할지 몰라도 어느 정도 겪어보기도 했다. 이런 세계의 존재가 거기 기웃거리는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비극임을 이 작품은 섬세하고 치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지향은 곧 길이고, 그 길을 걸을 뿐인 누군가는 길의 끝에서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그 거울에서 소박하게 만족한 미소를 띤 누군가가 서 있을 수도, 괴물이 되어 있는 자신을 만날 수도 있다.”

 

윤태호의 웹툰 <미생>에 나오는 이 대사는 인간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존재로 그린다.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따라 살아가다 보면 그 길의 끝에서 둘 중 하나가 된단다. 자신의 소박한 삶에 만족하고 웃을 수 있는 보통 사람이거나 괴물이거나. 물론 이 둘을 양축에 놓고 그 중간에 온갖 스펙트럼이 있을 것이다. <미생> 같은 작품은 그 사이에서 분투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펼쳐낸다.

 

근면 성실한 악당들의 세계

 

윤태호의 또 다른 작품 <파인>은 전혀 다르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자신의 이익을 지향하고 꿋꿋이 걸어가는 괴물들이 떼거리로 아주 쏟아져 나온다. 이 작품은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선 유물을 꺼내는 ‘사업’에 뛰어든 여러 인물들이 벌이는 살벌한 한판 승부를 그려낸다. 그런데 주요 인물들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악당이다. 이렇게 주야장천 악당만 등장하는 만화가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다. 더 강한 놈과 약한 놈, 머리가 좋은 놈과 떨어지는 놈의 구분이 있을 뿐, 하나같이 악당이다. 악당들은 서로 기 싸움하고 머리 굴리고 물고 물리고 합치고 쪼개지기를 거듭하며 속이고 속고 죽이고 죽는다. 그 과정 끝에 무엇이 남을까? 승자독식? 공멸? 아니면?

 

저자는 ‘근면 성실한’ 악당들의 분투기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흥미롭다. 근면 성실하고, 용의주도하고, 불굴의 의지를 갖춘 악당이라니. 근면 성실, 최선을 다함, 불굴의 의지 등이 그 자체로 무조건 좋은 미덕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의 추구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적’ 덕목이라는 것을 이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드러낼 수 있다니! 차라리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세상에 유익할 자들이 어찌나 부지런히 일을 벌이는지. 자기 관리는 또 얼마나 철저하고 깔끔한지. 악당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극강의 악당들이 ​최고의 지략과 대담한 실행 능력을 극도로 발휘해 열심히 일을 벌인 끝에 모든 것이 틀어지고 파국에 이른다. 독자는 악당으로 성공하는 건 물론이고 살아남는 것조차 보통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나쁜 일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위험천만하다면…, 그냥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착하게 사는 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솟구치게 한다. 이 만화, 엄청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대단히 교훈적인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웹툰 <파인> 포스터.

 

닫힌 세계

 

<파인>은 대단히 ‘논리적인’ 작품이다. 인과관계가 치밀하게 얽혀 있다. 기독교에서 애지중지하는 ‘회심’이 없다. 주인공 희동이 거의 유일하게 가끔 도덕적으로 갈등하고 자신의 행동에 가책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 주기는 한다. 특히 마지막 액션이 펼쳐지기 전,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한 여인을 바라보면서 그는 꽤 깊이 고민한다. 그것이 은총의 통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에는 어김없이 고민과 가책을 과감하게 떨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런 모습이 작품의 개연성을 높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 사람 잘 안 바뀌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파인>은 닫힌 세계다. 그 바깥에서 들어오는, 위에서 주어지는 은총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구원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생존 투쟁, 적자생존(適者生存), 자연 도태. 피로 물든 이빨과 발톱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믿는 것은 가족이다. 숨겨놓은 아들을 챙기고, 조카를 믿고, 사람을 죽여 놓고도 자식이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인간은 결국 어딘가에는 기댈 수밖에 없는 법. 악당에게 믿을 것은 돈과 핏줄뿐이다.

 

<파인>이 보여주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일부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런 세계를 뉴스에서 보고 이야기로 들었으며, 강도와 빈도는 덜할지 몰라도 어느 정도 겪어보기도 했다. 이런 세계의 존재가 거기 기웃거리는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비극임을 이 작품은 섬세하고 치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보물선 사업의 실행자로 희동의 삼촌 관석을 스카우트한 송 사장이 유물을 건지는 불확실한 사업을 맡기로 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건이 나오는 대로 사주겠다는 전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물건이 얼마 안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이 부분을 지적하는 관석에게 송 사장은 마련해 둔 수를 소개한다. 그릇이 얼마 안 나올 경우를 대비해 신안 앞바다에 그릇 300개를 ‘심어 놓은’ 것이다. 그러면 따개비고 조개고 붙어서 적당히 낡아 보이게 된다는 것. 6개월만 있어도 2-3백년은 되어 보인단다.

 

이쯤 되자 관석은 궁금해진다. 그런 편리한 방법이 있는데 왜 처음부터 그것들을 팔지 않느냐는 의문이다. 여기에 대해 송 사장은 나름의 질문으로 대답한다.

 

“이 친구야, 사기를 치려면 뭐가 중요한 줄 알아?”

 

이 질문 앞에 독자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송 사장은 예상 답안을 읊는다. “거짓말? 잔재주?”

그렇게 되묻고 송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을 내놓는다.

 

“‘진심’이 가장 중요해.”

 

이게 무슨 말인가? 사기꾼에게 중요한 것이 진심이라니?

 

“책상 위에 물건 놓고 이건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건이다, 라는 것에 스스로 정적해져야 하는 것이다.”

 

진심이 아니고는 상대를 속일 수 없다. 그래서 상대의 눈앞에 내놓는 물건만큼은 진짜여야 한다. ‘진정성’이 없는 사기는 상대가 다 알아본다. 거짓이 힘을 발휘하려면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하는 법. 근면 성실이 제대로 된 악당의 중요한 덕목인 것처럼, 진정성은 사기의 필수 요소라는 말은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어찌 되었든, 이익만이 전부인 사기꾼의 입에서 원래의 의미를 잃고 엉뚱한 맥락에서 쏟아져 나오는, ‘진심이 중요하다’,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따위의 말을 듣노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언어가 이렇게 철저히 도구화되면, 거기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경건한 종교적 언어를 덮어씌운다 해도 부질없는 일이 된다. 언어야 물론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말이 전부인 줄 알고 속으면 안 된다. <파인>의 세계와 다른 세계, 이익이 전부가 아니고 은총이 들어설 자리가 있고 돌이킴이 가능한 세계가 있다고 누구보다 큰소리로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더더욱 명심해야 할 사실이겠다. <미생> 식으로 말하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길을 걸어가는지 볼 일이다. 남들 이야기할 것 없다. 우선 나부터 들여다볼 일이다. 거울 앞에 혹시 괴물이 서 있지 않은지. 내가 뭐라고 말하고 글을 쓰건 상관없이, 실제로 사는 세계는 <파인>의 세계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1) 巴人. 촌뜨기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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