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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마음은 때로 낡아버린 표정에서, 구겨진 신발에서, 텅 빈 방 한 켠에서 포착되곤 한다. 이미랑 감독의 영화 <딸에 대하여>는 그러한 장면들을 잠잠히 바라보면서 ‘나’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짚어낸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본문 중)
최주리(청년활동가)
‘나’는 낡은 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강사인 딸 그린이 집의 보증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나’의 집에 들어오게 된다. 함께 살고 있던 7년 된 동성 연인 레인과 함께.
딸의 동성 연인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한집에 함께 살게 되면서 ‘나’는 딸에 대해, 이러한 상황에 대해 깊은 양가감정을 느낀다. 여느 부모들이 그렇듯 ‘나’는 딸만큼은 덜 힘들고 잘 살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자신이 먹을 수박은 숟가락으로 대충 퍼먹어도 되지만 딸이 먹을 수박은 정갈하게 잘라 접시에 담아줄 만큼. 하지만 딸은 자꾸 힘든 길만 걸으려 한다. 동성 연인과의 만남은 어린아이 소꿉장난과 같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자신의 일도 아님에도 동성애를 이유로 해고당한 동료 강사를 위해 시위에 나섰다가 싸움에 휘말리는 딸이 답답하고 야속하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7년에 출간된 소설 <딸에 대하여>는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자 돌봄을 받게 될 사람으로서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고도 담담한 문체로 그려내어, 이 소설을 쓴 김혜진 작가는 이듬해에 신동엽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이 영화로, 영화가 소설로 바뀌어 나오는 일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다. 소설만이 담아낼 수 있는 깊이와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로 독자와 관객들은 이야기를 보다 다채롭게 경험하게 된다. 소설 『딸에 대하여』는 지금껏 읽어온 책들 중 허공에 떠도는 것 같은 감정을 가장 섬세하고 정확하게 포착해 낸 소설로 꼽을 수 있었다. 소설에서는 딸에 대한 ‘나’의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몸으로 오는 마음의 상태. 딸애가 죽어 버렸다고 여기면 상실감이, 딸애가 어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 배신감이, 때로는 그게 무슨 감정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어떤 마음들이, 생각들이 내 몸 여기저기를 쾅쾅 때리고 지나갔다. (105쪽)
감정과 마음은 때로 낡아버린 표정에서, 구겨진 신발에서, 텅 빈 방 한 켠에서 포착되곤 한다. 이미랑 감독의 영화 <딸에 대하여>는 그러한 장면들을 잠잠히 바라보면서 ‘나’의 근원적인 두려움을 짚어낸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얼핏 영화의 줄거리만 보면 딸의 동성 연인과 한집에 살게 된 것이 ‘나’의 주된 갈등 같아 보이지만 ‘나’의 두려움은 그보다 좀 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두려움에 대하여
‘나’는 요양보호소에서 제희 어르신을 전담하고 있다. 젊었을 때 많은 돈을 벌었던 제희 어르신은 어린이 재단을 세워서 수많은 어린이들을 돕는 데에 재산과 젊음을 쏟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재단의 돈도 거의 남지 않게 되자 재단의 사무국장은 곧 재단이 정리될 것이라며 요양원에 더 이상 기부금을 보내지 않겠다고 하고, 제희 어르신이 언론과의 인터뷰도 어려워질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않아지자 그를 찾던 많은 이들은 사라진다. 요양원은 재단으로부터 더 이상 기부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제희 어르신에 대한 지원을 줄이다가 결국 치매 노인들을 보내는 산속 요양보호소로 전원시키기로 결정한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았던 제희 어르신이 내쫓기는 과정에도 그를 찾거나 돕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제희 어르신을 위해 요양원과 싸우다 결국 요양원에서 해고당한다. ‘나’는 수소문을 해 제희 어르신이 있는 요양보호소를 찾게 되는데, 그곳은 환자의 수에 따라 지원금을 받기 때문에 중증인 노인들은 약에 취해 하루 종일 잠만 자게 하는 곳이었다.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제희 어르신을 그곳에서 빼내 집으로 데려온다.
혈연이나 친구도 아니었고 제희 어르신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도 아닌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제희 어르신에게 매달렸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큰 재산과 명예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도왔었음에도 늙고 돈이 없어지자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맞게 된 제희 어르신이 겪는 그런 미래가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제희 어르신을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그래서 딸이 동성 연인과 헤어지고 적당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그저 평범하고 모나지 않게, 적당하고 평탄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제희 어르신과 자신, 딸의 마지막이 비참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평범하고 모나지 않으며 적당하고 평탄한 삶이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갈등과 투쟁을 해야만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와 딸 그린은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었다. 소설에서는 제희 어르신을 바라보는 ‘나’의 속마음을 통해 그 두려움을 보여준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걸까. 마음은 왜 항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 (129쪽)
혼자라는 두려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라는 불명예를 오랜 시간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노년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금의 청년층이나 중년층은 평균적인 경제적 수준이나 학력 수준, 스스로를 돌보는 경험이나 인프라 등이 지금의 노년층보다 낫기 때문에 이들이 노년이 되었을 때는 빈곤율이 지금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노년 생활을 위해 재테크를 하고 투자 안목을 기르기 위한 공부를 하고 돈을 모은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노년 생활 대비는 재정적인 준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혼자 사는 고령자보다 가족과 함께 사는 고령자가 덜 외롭고 만족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혼자 사는 고령자가 비교적 빈곤율이 높고 사회적 고립도도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산층 노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가장 외로운 사람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 가족과 함께 사는 노인이며, 노인의 자살률은 독거노인보다 동거 노인이 더 높다고 한다. 또한 자녀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가까이에 사는 사람, 멀리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 만족도와 고민, 외로움, 불안의 정도를 비교했을 때 자녀가 없는 독거노인이 가장 만족도가 높고 고민이나 외로움, 불안이 더 낮은 것으로 나왔다.1) 점점 삶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우리는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리더라도 외롭지 않고 안정적인 노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연애, 결혼, 출산의 여부와 별개로 혼자가 될 수도, 함께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누구나 생애 동안 기존의 관계를 이어가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도움을 주고받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결혼과 출산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의 형태도 늘어나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조사에 따르면, 스웨덴에서는 친인척이 아니어도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다면, 캐나다에서는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면 돌봄 제공자가 돌봄 수당이나 지원을 받을 수 있다.2) 먼 사촌보다 옆집 이웃이 더 가깝다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혈연이 아닌 관계에서 돌봄을 주고받는 일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마지막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나’와 그린은 같은 마음으로 같은 것을 위해 싸운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이 외롭지 않고 존엄하게 살아가는 것. 이를 위해 그린은 같은 동료 강사의 부당 해고를 위해 싸우고, ‘나’는 재단의 지원금이 끊기고 찾아올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내쫓기게 된 제희 어르신을 위해 싸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둘은 닮았다.
제희 어르신이 함께하게 되면서 이제 ’나‘의 가족이 살던 집은 조금 독특한 공동체가 된다. 그럼에도 제희 어르신과 ’나‘, 그린과 레인이 서로를 챙기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집안일을 하고 서로를 돌보는 모습은 그저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제희 어르신은 어느 날 침대에서 잠자듯이 그렇게 훌쩍 세상을 떠난다.
제희 어르신의 장례식장은 ’나‘가 두려워했던 모습과 달랐다. 그린은 상주의 이름을 달고 레인을 비롯한 친구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킨다. ‘나’로 인해, 그린으로 인해, 레인과 그 친구들로 인해 제희 어르신의 마지막은 결코 외롭거나 비참하지 않았다. 평생 후원하고 보살피고 존경을 보내왔던 이들은 곁에 없었지만, 가족도 관계자도 도움을 받은 사람도 아니지만 그를 애정으로 돌보고 마지막을 함께하고 장례식장을 끝까지 지켜 주었던 이들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두려움을 깨뜨렸다. ‘정상 가족’의 테두리 바깥에서도 ‘가족과의 외롭지 않은 마지막’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제 자신의 마지막도 딸 그린의 마지막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1) 우에노 지즈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동양북스, 2022), 31-32. 김희경,『에이징 솔로』(동아시아, 2023)에서 재인용.
2) 허민숙, “가족 다양성의 현실과 정책 과제: 비친족 친밀한 관계의 가족 인정 필요성”, 「NARS 현안분석」 제251호, 국회입법조사처 2022. 05. 16. 김희경,『에이징 솔로』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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