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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같이 읽을 작품은 『희랍어 시간』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강 소설 가운데 가장 따뜻한 작품이 바로 『희랍어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강 소설을 읽다 보면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인 인간이 폭력에 훼손되고 파괴되는 모습에서 고통스러워질 때가 많은데, 『희랍어 시간』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경험할 수 있는 다정함이랄까 온기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

 

정영훈(경상국립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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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같이 읽을 작품은 『희랍어 시간』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강 소설 가운데 가장 따뜻한 작품이 바로 『희랍어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강 소설을 읽다 보면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인 인간이 폭력에 훼손되고 파괴되는 모습에서 고통스러워질 때가 많은데, 『희랍어 시간』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경험할 수 있는 다정함이랄까 온기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철학과 불교적 사유에 뿌리를 둔 사색의 결과들이 담긴 문장들도 읽는 맛이 있습니다. 철학의 언어는 대개 단단하고 차갑기 마련이지만, 이를 전달하는 『희랍어 시간』의 문장들은 감각적이고 유려합니다.

 

아래 인용문을 읽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105쪽)

 

희랍어로 된 원전에서 철학자가 이 논증을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논외로 해 두겠습니다. 가령 죽음에 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생물학적 수명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죽음을 만난다고 말할 때, 죽음은 우리 바깥에 있는 무엇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죽음이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세상에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죽음이 우리와 함께 있었다고, 우리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것과 함께 죽음 역시 그 몸집을 키워 나가다가 마침내 몸 전체를 지배하게 될 때 우리는 결국 죽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죽음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 삶에 주어진 과제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죽음과 더불어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

소설의 주인공인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눈을 파괴해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질환이 있었던 것이지요. 남자의 약한 시력은 아버지에게서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중년의 나이에 시력을 잃었는데 같은 질병이 남자에게 대물림되었습니다. 의사는 남자에게 마흔 살 무렵이 되면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고,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이 삶의 경로로부터 남자는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거나 때때로 망각하며 지낼 수는 있었지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지요. 위의 인용문을 참고하여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나를 해치는 것과 함께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이것이 남자의 삶에 주어진 과제가 되었다고 말이지요.

 

시력을 상실했을 때 남자의 아버지는 남은 삶도 함께 잃어버렸습니다. 살아갈 의지를 아예 상실해 버린 것이지요. 어쩌면 아버지는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리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을 테고, 그랬기에 그 이후의 시간을 살아갈 준비를 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시력을 회복하기 힘들다는 사실 앞에서 급격히 무너져 내린 아버지와 달리, 남자는 자기에게 닥칠 일을 애써 부인하지 않으면서 예정된 미래를 향해 천천히 그 길을 걸어갑니다. 좀 더 의연하게 대처했다고나 할까요. 남자는 대학에서 희랍 철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눈을 혹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낯선 언어로 쓰인 옛 문헌을 읽어야 하는 철학자의 경우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희랍어 수업을 준비하며 돋보기로 문장을 읽어 나가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느낌이 올 것입니다. 혹 남자는 이런 선택을 통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운명에 항의해 보려 했던 것일까요.

 

남자가 특별히 관심 있어 한 것은 플라톤 철학이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플라톤은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세계, 영원에 속한 세계만이 참된 세계라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남자를 매료시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각을 잃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결정되어 있는 남자에게는 이데아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이제 곧 잃게 될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에 몰두하기 전 화엄의 세계에 매혹당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가 떠올리는 기억 속 장면들은, 남자가 이 세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잘 보여줍니다. 성 슈테판 성당을 묘사한 장면이 대표적입니다(42쪽).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한 색채를 비롯하여 성당 안의 세부들이 시각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연등회 때 보았던 형형색색의 지등(紙燈)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요.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앞발이 닿지 않아 포도를 따 먹을 수가 없게 되자, 여우는 “어차피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하고 돌아섰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여우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위로한 것인데요, 남자도 그랬던 것일까요(친구인 요아힘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남자가 이데아의 세계에 매혹당한 것은 감각 세계가 헛되다는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가 이 세계를 참으로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력을 잃어 더 이상 이 아름다운 세계를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자각이 이 세계를 영원 속에 붙들어 매 놓고 싶은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이 이데아를 향한 매혹으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이지요. 남자는 이 세계의 가치를 폄훼함으로써 자신의 상실감을 누그러뜨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희랍어 시간』 표지 ⓒ문학동네

 

3

이 남자가 자신의 희랍어 수업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여자는 말을 잃었습니다. 여자를 상담한 심리치료사는 최근 몇 년 동안 그녀에게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 원인일 수 있다고 진단하지만, 여자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과거에도 말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말을 앗아간 것은 언어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 말을 잃었던 순간을 되짚으면서 여자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 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15쪽)라고 말합니다. 말은 자주 발화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실패합니다. 말하려던 것과 말로 표현된 것 사이의 괴리가 여자를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탓했을 수도 있겠고, 그러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여자에게서 말을 앗아갔다는 우리의 짐작이 옳다면, 여자의 경우도 그녀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녀 자신을 해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을 잃게 되었을 때 여자는 이제까지 해 오던 문학 강의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아이의 양육권도 잃었습니다. 전남편은 “그녀가 정신적으로 너무 예민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22쪽)고 주장했고, 처음 말을 잃었을 때 받은 정신과 진료 기록을 증거로 제시했더랬습니다. 이제 말을 잃었고 그나마 있었던 수입원도 사라졌으니, 양육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은 영영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자는 시인입니다. 현재 여자의 처지를 두고 생각해 보면, 말에 대한 감각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벼리는 일에 종사하기로 한 이 선택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어 보입니다. 시력이 약한 남자가 눈을 혹사하면서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것과 비슷하게, 여자 역시 자신을 해친 그 예민한 감각을 오히려 소중하게 여기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4

그러니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이 만났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것이 희랍어라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희랍어는 고대 그리스 문헌들과 신약성경을 기록하는 데 사용한 언어입니다. 아마 기독교인들에게는 헬라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것입니다. 희랍어는 ‘죽은 언어’입니다. 읽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대화의 용도로는 쓰이지 않기 때문에 ‘죽은’ 언어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오늘까지도 희랍어가 사람들이 가르치고 배우고 읽는 언어로 살아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말의 의미나 용법은 사람들이 사용함에 따라 줄곧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희랍어는 제한된 숫자의 기록들 안에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의미와 용법 역시 고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덕에 후대 사람들이 이들의 용례를 비교함으로써 단어의 뜻과 문장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대화의 수단으로는 쓰일 수 없는 언어가 두 사람을 연결해 주고 있다니 재미있지 않습니까. 여자는 지금 말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언어는 오히려 두 사람을 이어 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언어를 배우는 자리였다면 여자는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말을 주고받는 연습을 해야 했을 테니까요. 문장을 읽어 보라는 남자의 요청에 여자가 끝내 응답할 수 없었던 장면을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언어가 필요했고, 관계를 시작하는 상황에서는 희랍어 같은 언어가 제격이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가까워졌을 때 여자는 남자의 손바닥에 글자를 적어 자기 의사를 전달합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 소통하는 이 장면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자는 쓰자마자 휘발되어 버리고 말 그 문장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감각을 자기 손바닥에 집중시켰을 테지요. 손가락의 감촉, 온기, 미세한 떨림, 필압으로 문자적 의미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를 헤아려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남자에게는 두 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남자가 처음 사랑했던 여인은 어렸을 때 청력을 잃었고,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육체의 시력을 잃게 될 자기 처지에만 몰두했던 탓에 남자는, 여인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무리한 부탁을 하고 맙니다. 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대로 무슨 말이든 해 달라고 한 것이지요. 여자는 분노했고, 그렇게 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맙니다. 영혼의 단짝이었던 친구 요아힘은 어렸을 때부터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그는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그 덕에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112-13쪽)를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물이기도 했지요. 그는 누구보다 많은 고통을 겪었던 탓인지 남자의 고통에는 의외로 둔감했고, 때때로 사려깊지 못한 말을 내뱉어 남자에게 상처를 입히곤 했습니다. 그런 요아힘이 남자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표현해 왔을 때 남자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요. 희랍인들은 고통을 통해 배운다는 말을 했다고 하지요. 남자도 모양이 비슷한 두 단어[‘수난을 겪다’는 뜻의 동사 παθεῖν(파테인)과 ‘배워 깨닫다’는 뜻의 동사 μαθεῖν(마테인)]를 언급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인 만큼 이제는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관계 역시 보다 성숙하게 이끌어 가게 될까요. 아니면 여전히 어리석은 채로 예전의 실패를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될까요. 어느 쪽으로든 확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 장면들이 다소간에 낙관적인 기대를 품게 만든다는 점만은 언급해 두고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자가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이 다시금 말의 형체를 입고 내뱉어지기를 바라는 저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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