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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에게 광주가 개인적 접점을 갖는 곳이었다면, 제주는 이러한 접점이 전혀 없는,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주로 향하는 문이 되어 준 것이 바로 광주였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적어도 소설 속 ‘나’의 경우 광주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전 이미 내 속에 제주 4.3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정영훈(경상국립대 교수, 문학평론가)

 

제주에 관해 쓴다는 것

 

제주 4·3에 관해 쓰는 것은 작가 한강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1980년 광주를 소재로 한 󰡔소년이 온다󰡕의 경우 이 작품을 쓴 데는 작가 자신이 광주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지요. 그날 현장에 같이 있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다소 개인적이고 특별한 성격의 죄책감을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소년이 온다』는 광주가 안겨주는 부채감, 죄책감에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작가적, 윤리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주는 어땠을까요. 개인적인 접점이 없더라도 쓸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직접 겪는 고통만을 써 온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작가이고 보면, 제주에 대해 쓰는 일은 광주의 경우보다 더 큰 과제로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개인적인 접점이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그 추체험의 과정이 다소간 인위적이라고 느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읽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문제를 어떻게 돌파해 갈 것인가 하는 이것이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과거의 공적인 기억, 집단적인 규모의 고통을 어떻게 나의 고통으로 받아 안을 것이냐, 이를 소설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하는 것이 온당하냐 하는 윤리적, 미학적 문제와 연결될 것입니다.

 

광주에 관해 쓴다는 것, 광주를 ‘앓는’ 일

 

소설은 꿈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눈이 내리고, 벌판에는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심겨 있습니다. ‘나’는 묘지를 떠올립니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바다가 밀려 들어옵니다. 낮은 쪽의 무덤은 점점 바닷속으로 잠기고. 위쪽에 묻힌 뼈들을 옮겨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한편, 이 다급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속에서 ‘나’는 눈을 뜹니다. 이 꿈은 ‘내’가 두 번째 꾸는 꿈이었습니다. ‘내’가 이 꿈을 처음 꾼 것은 2014년 여름, K시의 학살에 대한 소설을 내고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K시가 광주고, 소설이 다루고 있는 것이 1980년 5월 그곳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이며, 이 소설이 2014년에 나온 『소년이 온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K시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나’는 관련 자료를 읽었고,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곧바로 악몽을 꾸기 시작합니다. 꿈에서 공수부대를 피해 달아나다 곤봉에 맞고 쓰러지기도 하고, 발로 차이고, 칼에 찔리기도 합니다. 소설이 마무리되고 책이 나오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깨지고 맙니다. 출간 후 두 달 만에 꾼 꿈이 이를 방증합니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4년 동안 나는 유서를 썼다 찢는 일을 반복했고, 어쩌면 이 소설과, 혹은 삶 자체와 결별하고 싶은 소망을 담아 「작별」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쓰기도 했지만, 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두 번째로 꿈을 꾸게 됩니다. 처음 꿈을 꾸었을 때 ‘나’는 이 꿈이 K시에 관한 것이었다고 이해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이 꿈을 꾸면서, ‘나’는 이게 이미 쓴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제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이 꿈은 일종의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이지요.

 

꿈을 꾸고 서너 달이 지난 12월 하순 아침, 친구인 인선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병원으로 좀 와 달라고 말입니다. 인선과 ‘나’는 편집 기자와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만나 3년 동안 같이 작업을 했고, 그 후로도 이십 년을 친구로 지내 왔습니다. 처음 그 꿈을 꾸고, ‘나’는 인선에게 꿈에서 본 그 이미지대로 같이 작업을 해 보자는 제안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오는 동안 여러 사정으로 작업은 진행되지 못했고, 마침내 지난여름 인선에게 프로젝트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했더랬지요, 인선은 “어쨌든” 자신은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고요.

 

인선이 말한 병원에 도착해서 그곳이 봉합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목공 작업을 하다 사고가 난 것이 틀림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이 사고가 바로 그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직감합니다. 자기 때문에 인선이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 이상 ‘나’는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내’가 제안하고 인선이 수락했던, 하지만 ‘내’가 먼저 발을 뺀 바로 그 일로부터 말입니다. 나중에 확인하게 되듯이, 인선의 목공방이 있는 제주로 갔을 때, 거기서 ‘내’가 하게 될 일은 1948년 4월 이후 제주에서 있었던, K시에서의 일과 모든 면에서 비슷한 바로 그 사건을 기억하는 일이었습니다. K시에 대한 이야기를 쓴 이후 찾아온 꿈은 이렇게 제주에 대해 기억하고 쓰는 일로 이어집니다. K시가 제주를 불렀다고나 할까요.

 

제주가 광주를 불렀다

 

작가 한강에게 광주가 개인적 접점을 갖는 곳이었다면, 제주는 이러한 접점이 전혀 없는,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주로 향하는 문이 되어 준 것이 바로 광주였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적어도 소설 속 ‘나’의 경우 광주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전 이미 내 속에 제주 4.3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0년 겨울 즈음, 인선과 함께 국수를 먹던 어느 눈 오는 날, 인선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엄마가 열세 살일 때, 네 살 터울 진 언니와 외가에 갔다 돌아와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군경에 의해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빠와 여동생의 시신을 찾기 위해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그들의 얼굴 위로, 간밤에 내린 눈이 얇게 덮여 얼어 있더라고요.

 

그 이듬해부터 인선은 다큐 영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2007년으로 짐작되는데, 만주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인선은 제주 공항 활주로에서 유골들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됩니다. 같은 해, 어쩌면 그 이듬해 인선은 자신이 인터뷰이가 되어 답하는 방식의 다큐를 제작합니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4‧3 희생자들이 겪었던 일을 다른 사람 대신 구술하는 형식의 다큐였습니다. ‘나’도 이 작품을 보았고, 그 내용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K시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 읽기에 몰두하던 2012년 겨울, ‘나’는 도서관에서 제주의 학살에 대한 구술 증언 자료집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이들 이야기는 나중에 인선이 들려주는 이야기, 인선의 어머니가 수집한 자료들과 어우러져 당시 있었던 사건의 맥락을 살피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요컨대, K시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기 전에 이미 ‘나’에게는 1948년 4월 이후 제주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고, 소설을 쓰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자료를 읽어 나가던 바로 그때 제주에 관한 자료들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광주가 제주를 부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광주 이전에 이미 제주가 있었던 것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표지, ⓒ문학동네

 

혼들이 돌아오는 세계

 

인선은 ‘나’에게 제주 집으로 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가서, 자기가 기르는 새인 아마가 살아 있는지 확인해서 돌보아 달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제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상 악화로 더 이상 비행기가 운행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겪은 온갖 위험한 상황들을 생각하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이런 인선의 요청이 무례하고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인선은 한 번도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었지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는 겨우 인선의 집에 이르게 됩니다. 가서 보니 아마는 이미 죽어 있었고, ‘나’는 아마를 묻어 줍니다. 잠깐 잠이 들었던 듯 눈을 떴을 때 새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놀랍게도 거기 아마가 있었습니다. 서울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도 있었지요. 얼굴은 창백하고 야위었지만 오른손은 상처 없이 깨끗했습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고, 죽을 끓여 먹고,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었던 1948년과 그 이후의 시간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로 채워진 2부를 이해하기는 몹시 까다롭습니다. 이 이야기는 꿈이나 환각이었을까요. 혹 인선이 죽고 그 혼이 지금 이곳을 찾아온 것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죽은 것은 ‘나’이고, ‘내’가 혼이 되어 인선을 찾아온 것이었을까요. 저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이곳, 인선의 공방을 죽은 혼들이 살아 돌아오는 공간으로 읽었습니다. 이제 막 죽은 아마가 돌아오고, 그보다 몇 달 앞서 죽은 아미가 돌아오고, 오래전에 죽은 이들, 제주 4.3의 억울한 희생자들이 돌아오는 곳으로 말이지요.

 

인선은 ‘나’에게 말합니다.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고요. 어느 순간 ‘나’에게도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이 소리는 오래전 죽은 이들의 혼이 내는 소리였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이는 3부에서, 나무를 심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한 이야기에서 명확해집니다. 인선은 말합니다. 엄마 없이 잠들 수가 없고, 계속 죽고 싶은 생각만 들던 어느 날 새벽 지금 서 있는 이곳으로 왔고, 그때부터 낮에는 공방에서 나무를 깎고, 밤이면 구술 증언 자료들을 읽어 나갔는데, 군경이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어느 밤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왔구나.”

 

인선은 10년 넘게 누군가가 무시로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죽은 이들의 혼이 찾아왔을 때 인선은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덧붙이지요.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중략)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인선이 제주 집으로 가 달라고 부탁하면서 아마 이야기를 했던 것은, 사실은 무시로 찾아오는 이 혼들을 만나 달라는, 혹은 돌봐 달라는 의미였던 것이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들을 생각하며 애초 같이 하기로 한 바로 그 일을 다시 시작해 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라고요.

 

이후 인선은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나무를 심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그 땅에 이릅니다. 사실 그곳은 인선의 집을 찾아오다 ‘내’가 쓰러졌던 바로 그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실 ‘나’는 이제껏 여기 이곳에 쓰러져 있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쓰러져 있던 그곳에 인선의 혼이 와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반대로 자신은 사라지고 인선은 병상에서 눈을 뜨는 상황을 가정해 보기도 합니다. 인선과 ‘나’ 두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해 소설은 어느 쪽으로도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둘 중 누구도 이 단계에서 삶이 마무리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둘이 모두 살아 있어야 함께 하기로 했던 그 작업을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강의 다른 작품을 읽으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의무가 있는 한 이들은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가슴과 가슴을 이어주는 금실

 

두 사람이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작가가 읽었던 시가 있지요.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2017년에 한강이 쓴 단편 「작별」(『작별하지 않는다』에도 언급되었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 여성이 남자와 같이 국수를 먹다가 예전에 라디오 방송에 나온 적 있는 사연을 떠올립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과 결혼한 여성입니다. 학창 시절 노총각이었던 선생님과 어쩌다 칼국수를 같이 먹게 되었는데 그릇이 비니까 선생님이 그릇 두 개를 붙여 자기 그릇의 칼국수를 덜어주었습니다. 칼국수 면발이 그릇 둘을 연결한 것을 보고, 문득 자기 둘의 인생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사랑하고 결혼에 이르게 되지요. 그러니까 두 사람에게는 칼국수 면발이 두 사람의 가슴을 이어주는 실이었던 셈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도 이 실이 있습니다. 잘린 손가락을 이어 주는 신경이 이 실이고, 이 실은 인선의 혼과 내 혼을 이어 주는 실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소설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 그게 너일까, 다음 순간 생각했다. 네가 지금 진동하는 실 끝에 이어져 있다. 어두운 어항 속을 들여다보듯, 되살아나려 하는 너의 병상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각기 생사를 헤매는 두 사람이 서로를 간절하게 떠올리고, 그 간절함이 상대를 자기 곁으로 부릅니다. 저는 이 생각대로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손가락 신경들이 이어지게 될 것이듯이, 서로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상대의 혼을 부르고, 그렇게 둘의 혼을 이어준 실이 서로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고,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주에 관한 이야기들

 

인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증언들에 기초해 있습니다. 학살이 있었던 당시 인선의 아버지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주로 동굴에서 혼자 지냈는데, 집에 와서 보니 할아버지는 죽어 있고, 나머지 가족은 군인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간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 일주일 만에 경찰에게 잡혔고, 보름간 잡혀 있다 목포항으로 이송되었고, 대구 형무소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전쟁 직후 풀려났습니다. 이 이야기 이후에 인선은 자료집 가운데 한 대목을 보여 줍니다. 1963년, 그러니까 그날로부터 15년이 지난 시점의 일이었습니다. 한 사내가 찾아와서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쩐지 그날 찾아온 그 남자가 인선의 아버지였던 것은 아닌가 짐작하게 합니다.

 

인선은 어떻게 그 노인의 증언 속 남자가 아버지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몇 가지 정황상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단언해 버린 것일까요. 어느 쪽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기록으로 남은 증언들은 실체 없이 말로만 쌓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니라, 더운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고. 그래서 그게 누구의 이야기이든 그 이야기는 곧 아버지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고.

 

인상적인 것은 인선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동시에 내가 2012년 K시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며 읽었던 자료의 기록을 떠올리는 대목입니다. 처음 그 기록을 읽었을 당시 그 이야기는 ‘나’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어디 먼 곳에서 일어난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선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게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의 가족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읽은 그 누군가의 이야기들은 인선이 하는 자기 피붙이의 이야기와 이어져 하나의 맥락을 이루고,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였던 한 사람의 삶과 만나면서 생동감을 얻게 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하지만 그래서 더 와닿는 이야기

 

인선도, 인선의 어머니도 그날의 이야기를 자신과 그 피붙이의 이야기로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사사로움이 불만스러울 수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이 소설이 공적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들의 사사로움은 나쁜 의미에서 사적인 것이기보다, 이 일에 매달리는 동기의 측면에서 이들이 보인 절실함 혹은 감각의 깊이를 보여 준다고 말이지요. 이를테면, 희생된 모든 이들이 결국은 내 아버지고 어머니고 외삼촌이라는 감각. 이런 식으로 확장되는 사적인 것, 이것이 이 이야기의 배후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소년이 온다』도 그렇고 『작별하지 않는다』도 그렇고,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는 희생자들의 혼을 불러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많은 독자들이 한강 소설에서 초혼이나 씻김굿을 연상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 방법이 실제로 효력이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통해 희생자들을 애도하려 하는 데서, 저는 희생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문제에서 한국 교회의 무력을 절감합니다.

 

이 소설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자들을 애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을 불러 위로함으로써 해원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남은 유족들도 함께 위로하는, 전통적인 이런 방식을 부정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위로는 어떤 것일 수 있고 또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저는 답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대답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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