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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1944년 폴란드계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고안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가족 49명을 잃은 그는 특정 집단을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국가 범죄를 처벌할 법적 언어가 부재함에 절망했다. 그는 그리스어 ‘Geno’(민족)와 라틴어 ‘Cide’(살해)를 결합해 이 단어를 만들었고, 그의 노력으로 1948년 유엔은 “제노사이드 협약”을 채택했다. 유대인 렘킨이 만든 이 단어가 오늘날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는 역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문 중)

 

김상기(목사, 제노사이드 연구가)1)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전쟁인가, 제노사이드인가?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비극은 2025년 10월 말, 만 2년 만에 가까스로 휴전 합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태는 전 세계인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하마스의 민간인 학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였으나, 이후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의 대응은 ‘방어권’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지난 2년간 가자 지구에서는 6만 8천 명이 희생되었다. 전체 인구의 3%가 사라진 참극이다. 사망자의 70%에 달하는 여성과 아동의 희생은 이곳을 ‘어린이들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주택과 병원이 무너진 자리에는 회색빛 잔해만 남았고, 도시는 거주 불가능한 불모지로 전락했다. 굶주림과 전염병 속에 살아남은 190만 명의 주민은 끊임없이 강제 이주를 반복해야 했다. 삶의 터전과 기억마저 파괴한 이 참상은 단순한 물리적 충돌이 아니다. 한 민족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이자 ‘도미사이드’(Domicide, 거주지 파괴)라는 역사적 오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병원, 학교, 난민촌을 향한 무차별 포격과 물, 식량, 의약품의 전면 차단은 명백한 전쟁 범죄를 넘어 특정 집단의 물리적 절멸을 노린 체계적 시도였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를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 위반으로 경고했고, 국제앰네스티와 베첼렘 등 인권 단체 또한 이 사태를 단순 분쟁이 아닌 ‘아파르트헤이트’(인종 격리)이자 명백한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 네타냐후 총리가 성서 속 ‘아말렉’을 언급하며 완전한 진멸을 암시한 점, 고위 관료들이 팔레스타인인을 ‘인간 짐승’이라 칭하며 비인간화한 점은 제노사이드의 핵심 요건인 ‘의도성’을 증명한다.

 

왜 우리는 제노사이드에 주목하는가?

 

우리는 왜 이 참극을 ‘전쟁’이나 ‘분쟁’이 아닌 ‘제노사이드’라 불러야 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폭력’의 본질을 재정의해야 한다. 폭력은 단순히 물리적 타격이나 언어적 모욕에 그치지 않는다. 폭력의 본질은 ‘힘’(Power)이며, 곧 ‘관계’의 문제다. 폭력은 힘의 저울이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비대칭 관계에서 강자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대상화하고 파괴할 때 발생한다.

 

제노사이드는 이러한 힘의 불균형이 낳은 괴물이자, 모든 잔혹성을 표출하는 ‘무한 자유의 폭력’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가 그렇다. 점령국과 피점령국, 골리앗과 다윗, 식민 정착민과 원주민이라는 힘의 비대칭 속에서 발생한 폭력을 단순히 ‘분쟁’이라 불러선 안 된다. 지난 77년 동안 세계는 이 사태를 애써 외면해 왔으나, 이제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라 명명해야 한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 이미지가 벗겨지고 ‘신나치주의’ 혹은 ‘가해자’로 규정되는 담론의 확산이야말로 네타냐후 정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1944년 폴란드계 유대인 법학자 라파엘 렘킨이 고안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가족 49명을 잃은 그는 특정 집단을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국가 범죄를 처벌할 법적 언어가 부재함에 절망했다. 그는 그리스어 ‘Geno’(민족)와 라틴어 ‘Cide’(살해)를 결합해 이 단어를 만들었고, 그의 노력으로 1948년 유엔은 “제노사이드 협약”을 채택했다. 유대인 렘킨이 만든 이 단어가 오늘날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는 역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노사이드는 특정 시대의 비극이 아니다.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곳마다 제노사이드는 독버섯처럼 피어났다. ‘신의 뜻’을 빙자해 이교도를 학살한 중세 십자군, 몽골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 자행된 학살, 신대륙 발견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된 서구 제국주의의 원주민 학살은 모두 압도적인 무력 차이를 이용한 일방적 폭력이었다. 20세기의 히틀러 나치에 의한 유태인-우크라-폴란드-집시-장애인 학살(2천만), 오스만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 대학살(200만), 스탈린의 대숙청(6천만),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3천5백만), 일본의 난징대학살(30만), 폴 포트의 캄보디아 킬링필드(200만), 르완다 후투족의 투치족 학살(80만),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인종청소(10만), 수단 다르푸르 대학살(30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한국 현대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제 강점 및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벌어진 관동대학살(6천), 제주 4·3(3만), 신천대학살(3만), 국민보도연맹 학살(30만) 등은 국가 공권력이 비무장 민간인에게 가한 전형적인 비대칭적 폭력, 즉 제노사이드였다.

 

미국 제노사이드 연구가 루돌프 럼멜 교수는 20세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라 칭하며, 정부에 의한 대량 학살 희생자가 약 1억 7천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그는 이 숫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희생자들의 시체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어 놓는다면 지구 10바퀴를 돌 수 있는 수치다. 20세기 내내 전쟁에서 죽은 군인 수의 6배에 달한다. 무엇보다 20세기 100년 동안 학살로 죽은 희생자 수는 지난 24세기, 즉 2400년 동안 죽인 숫자의 3분의 1 규모다. 한 마디로,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다.”

 

제노사이드 속에는 어떤 폭력의 법칙이 숨어 있는가

 

제노사이드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며, 특정 악인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이는 정교한 구조와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보편적 폭력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가해자 집단은 ‘이념’을 통해 배타적 이상 사회를 선동하고, ‘분류’를 통해 우리와 그들을 나눈다. ‘상징화’로 적에게 낙인을 찍고, ‘비인간화’를 통해 상대를 벌레나 짐승으로 격하시킨다. 이어 ‘조직화’로 힘의 비대칭을 구축하고, ‘양극화’와 ‘고립화’를 통해 상대를 사회로부터 봉쇄한 뒤, 마침내 무차별적 ‘절멸’을 감행한다. 학살 후에는 ‘부정’을 통해 은폐하거나, ‘정당화’를 통해 국가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강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 각각의 단계가 이미 심각한 폭력이라는 점이다. 혐오 표현, 소수자 차별, 이념 갈등, 비인간화하는 언어, 양극화가 만연한 사회는 군사적 조직화만 갖춰지면 언제든 제노사이드로 치달을 수 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전후의 한국 사회 또한 이러한 위험 신호를 보였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폭력 인지 감수성’이 필요하다. 물리적 충돌뿐만 아니라 사회 내 힘의 불균형과 폭력의 전조 현상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민주주의는 왜 중요한가?

 

폭력이 ‘힘의 일방적 작용’이라면, 평화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억압할 수 없도록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때 평화는 유지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지만, 권력의 독점과 폭주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이다. 럼멜 교수의 말처럼 “문제는 권력이고, 해결책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시스템을 넘어 정신(mind)의 문제다. 전체주의, 배타성, 이분법적 사고, 불관용, 우월주의, 폭력성, 반지성주의 등 파시즘적 마인드를 경계해야 한다. 대신 복잡성과 모호성을 수용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책임과 권한을 공유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민주적 마인드를 함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로 부름받았다. 이는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라는 윤리적 권면이 아니다. 기울어진 힘의 운동장을 바로잡고,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서 힘의 균형을 맞추라는 구조적 명령이다. 제노사이드라는 거울 앞에서 우리는 내면의 폭력성을 성찰하고, 힘의 일방성을 경계하며, 진정한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1)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영성학을 공부했다. 남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갈릴리겨자나무교회 담임목사다. 신학계에서는 최초로 제주 4·3사건을 제노사이드 관점에서 연구하여 제노사이드 속에 작동하는 10가지 폭력 메커니즘을 국내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후 『제노사이드 속 폭력의 법칙』을 저술하고, 세계적인 제노사이드 학자 이스라엘 차니의 책 『폭력의 전염: 우리 안의 12가지 제노사이드 심리』와 팔레스타인 목회자 문터 아이작의 책 『왜 세계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 침묵하는가』를 번역했다. 이 외에 다수의 제노사이드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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