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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앙 집중과 지역 소멸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지역 주권이 강화되는 국가 체제와 정치적 틀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혁신의 방향은 분명하다. “지역 소멸에서 소생으로, 단극 체제에서 다극 체제로, 중앙 집중에서 분권화로, 향앙 정치에서 탈앙(脫央) 정치로, 단방제에서 준 연방제로” 프레임을 전환해야 한다. 새로운 지향점인 다극적 탈중앙화와 준 연방제는 지역이 자주·자강하여 대한민국 전체를 다시 도약시킬 핵심 열쇠가 될 것이다. (본문 중)
김성희(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신약학 교수)
초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 아버지는 양손 가득 두꺼운 전집을 들고 들어오셨다.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거실에 모인 우리 형제자매 앞에서 아버지는 한문이 빼곡한 겉표지를 쓰다듬으며 이것이 우리 김씨 가문의 뿌리, ‘족보’라고 하시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셨다. 그날 이후 족보는 거실 책장에서도 가장 명당을 차지했다. 어린 마음에 내 이름도 그 안에 있는지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서늘했다. “딸들은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장남인 오빠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오빠의 이름만 찾아 주셨다. 그때 나는 막연히 깨달았다. 족보란 여자의 이름이 허락되지 않는 성역임을. 물론 현재는 여자들도 족보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족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어릴 때 들은 어렴풋한 상식을 처음 뒤흔들어 놓은 것은 마태복음의 서두를 마주할 때였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던 고대에 기록되었음에도, 예수의 족보에는 당당히 다섯 여성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마태복음은 1:1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에 관한 책”(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이라고 선언하며,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의 기원을 추적한다(마1:1-17). 누가복음 3:23-38에도 예수의 족보가 등장하지만, 두 복음서의 서술 방식과 인물 구성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마태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다윗(דָּוִד, 4+6+4=14)이라는 이름의 게마트리아 숫자인 ‘열네’ 대씩 끊어서 배열함으로써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했다면, 누가는 예수로부터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게까지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며 보편적 인류의 구원을 지향한다. 마태의 족보에는 총 41명이 등장하지만, 누가의 족보에는 총 77명이 등장하고 예수부터 아브라함까지 구간만 따져도 56명이 나온다. 마태보다 훨씬 세밀하고 방대한 명단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마태에는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이고,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으로 등장하지만, 누가에는 다윗의 직계가 나단으로 나오고, 요셉의 아버지도 헬리로 등장한다. 이처럼 두 족보가 상이한 것은 역사적 기록을 넘어 각 기자의 신학적 의도가 투영된 ‘신학적 족보’이기 때문이다. 대개 학자들은 마태를 권위적이고 유대 중심적인 시각으로, 누가를 서민적이고 세계 보편적인 시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약자와 소외 계층, 특히 여성을 중시한다고 알려진 누가의 족보에는 여성이 전무한 반면, 오히려 유대적 색채가 짙은 마태의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는 그 당시 유대 문화 역시 남성들 중심의 족보가 일반적이었는데, 마태가 독특하게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고, 이들의 존재는 우리가 그동안 견지해 온 마태 신학의 성격을 재고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
마태복음 서론의 견고한 남성 중심적 체계를 뚫고 등장하는 여성들은 다말(1:3), 라합(1:5), 룻(1:5), 우리야의 아내(1:6), 그리고 마리아(1:16)이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전략적 지혜를 발휘해 한계적 상황을 돌파했고, 결국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예수의 조상인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이방 여인이자 비천한 자로 기록된 라합은 여리고를 정탐하던 이스라엘인들을 숨겨주는 결단과 신앙 고백으로 구원에 이르렀으며,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다. 보아스의 아내가 된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남편을 잃은 뒤에도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신의를 지켜 이스라엘로 향했고, 그곳에서 오벳을 낳아 다윗 왕조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네 번째 여인은 우리가 흔히 밧세바로 알고 있는 ‘우리야의 아내’이다. 마태는 왜 그녀의 본명 대신 헷 사람(힛타이트 족속) 우리야의 아내라는 수식어를 고집했을까? 이는 존경받는 다윗 왕의 치명적인 오점을 숨기지 않으려는 의도이자, 앞선 세 여인의 ‘이방인 됨’이라는 맥락을 헷 사람 우리야와 연결해 확장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마지막 정점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이다. 성모 마리아에 이르러 완성되는 이 계보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부계 중심의 고대 사회에서 이 다섯 여성의 이름이 촘촘한 남성 이름들 사이를 뚫고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의 공통분모는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신학적 함의는 무엇인가?
남성 중심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헤게모니의 틈새에서, 이 다섯 여인은 ‘하나님의 의’를 꽃피우는 통로로 쓰임 받는다.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인 ‘의’(δικαιοσύνη, 디카이오쉬네)는 의로움과 올바름, 정의와 공의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바울 신학에서는 ‘의’가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적, 법정적 측면을 다룬다면, 마태가 강조하는 ‘의’는 이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천적 정의와 공의에 우선순위를 둔다. 예수께서도 자신의 사역을 “모든 의를 이루는 것”(마 3:15)이라 정의하셨고,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가치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임을 선포하셨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그 틈새를 메울 구속의 도구로 여성들을 선택하셨다. 견고한 남성들의 이름 사이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다섯 여인은 결국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산 상징이다. 이는 세상 권력자들의 힘의 논리가 고착된 인간 세상을 뒤엎으시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방식이다. 사회적 신분과 지위, 성별과 젠더를 넘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준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마 6:10).

예수의 기원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구속의 길을 예비했던 다섯 여성이 경험한 삶의 자리는, 어쩌면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실망스럽고도 절망적인 삶의 현장과 닮아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척박한 삶의 틈새에서 신실한 용기로 ‘하나님의 의’를 일구어낸 그 여성들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구속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또한 그들 중 한 명이 되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우리를 통해 지속되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꿈꾸며 기도한다. 갈라지고 메마른 땅의 틈새마다, 의로운 하나님 나라의 꽃이 눈부시게 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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