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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환의 시기에 그리스도인이 율법주의적 결벽증에 사로잡혀 시장을 외면하거나 방관자로 남는 것은 책임을 유기하는 것과 같다. … 완벽하게 깨끗한 금융 상품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되, 내가 가입한 연금과 금융 기관이 ESG 원칙을 준수하도록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고, 지역 사회와 협동조합, 사회적 금융 등 ‘사람을 살리는 자금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자원을 배정하는 과감한 실천이 요청된다. (본문 중)
안경상(이퀴녹스프라이빗에쿼티 부사장)
순결주의적 환상과 깨어진 ‘청정 구역’의 신화
그리스도인들이 자본주의와 금융 시장을 마주할 때 빈번하게 빠지는 함정은 ‘내가 과연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한가’를 따지는 순결주의적 착각이다. “나는 주식이나 투기적 자산에 손을 대지 않고 안전한 은행 예금과 적금만 이용하니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라거나 “사회적 책임 경영을 표방하는 일부 기업의 상품만 소비하고 있다”라는 식의 태도는, 현대 금융 시스템이 지닌 거대한 구조적 실상을 외면하는 매우 순진하고 안일한 발상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어느 특정한 종교적 에토스가 발명해 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 추구와 부를 향한 욕망이 긴 시간 속에서 빚어낸 필연적 결과물이다. 자본주의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려는 과거의 극단적 시도들이 모두 거대한 폭력과 빈곤으로 귀결되었듯, 자본주의는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 인류가 살아내야 할 엄연한 현실이다. 문제는 이 체제가 인간의 탐욕과 자기 확장 욕망을 강력한 동력으로 삼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부정적 방향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은행에 무심코 맡긴 예금과 적금, 그리고 매월 성실히 납부하는 국민연금은 결코 가만히 잠들어 있는 돈이 아니다. 그 자금은 지금 이 순간에도 화석 연료 개발, 무기 제조업, 혹은 파괴적인 부동산 투기 자금으로 변모해 전 세계의 구조적 불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동력이 된다. 내가 직접 ‘투기’ 전선에 뛰어들지 않았어도, 현대 금융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를 그 거대한 시스템의 공범으로 엮어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책임은 ‘더러운 돈을 멀리하고 나 혼자 깨끗한 청정 구역에 숨어 지내는 것’일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직면한 제도적 한계와 구조적 불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시스템 안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밀어 넣을 것인가 하는 ‘참여와 변혁’의 문제로 시선을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의: 부동산, 플랫폼, 그리고 학벌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 불의와 약탈적 수탈이 일어나는 주된 장소는, 많은 사람이 ‘투기판’이라고 말하는 주식 시장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불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은, 노동의 가치를 압도하는 세 가지 대표적인 지대 추구(Rent-seeking) 구조, 즉 부동산, 플랫폼, 그리고 학벌이라는 지대 원천이다.1)
첫째로, 부동산 불패 신화와 주거권의 침해이다. 주거를 위한 부동산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공적 재화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은 오로지 자산 증식과 불로소득 창출의 유일한 수단인 양 다루어져 왔다. 거주용 부동산을 투기적 자산으로 삼아 가격을 폭등시키고 청년층과 무주택 서민의 주거 비용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행위는, 성경이 엄히 경고하는, 이웃의 생계와 기본권을 잠식하는 대표적인 구조적 불의이자 지대 추구다.
둘째로, 디지털 플랫폼 독점에 따른 착취이다. 오늘날 거대 플랫폼 기업들은 네트워크 효과를 무기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수수료와 불리한 조건을 강제하며 부를 독점한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정보의 비대칭과 독점력을 이용해 사회적 약자의 고혈을 짜내는 또 다른 형태의 현대판 소작농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로, 학벌 카르텔과 제도적 진입 장벽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학벌 구조는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자원과 권력을 특정 집단이 독점하기 위한 강력한 ‘배제적 제도’로 작동한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실상은 출발선의 격차를 고착화하고 대다수 평범한 이들의 노동 소득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는 불평등의 온상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조들은 모두 토마 피케티가 경고한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을 압도하는’(r>g) 불평등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노동의 정직한 땀방울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나 자산 독점을 통해 얻는 불로소득이 사회를 지배할 때 공동체는 파괴된다.
제도의 전환과 그리스도인의 책임: 포용적 제도를 향하여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런 아세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입증했듯이, 국가와 사회의 장기적 성패를 가르는 것은 권력과 부가 소수에게 집중된 ‘수탈적 제도’(extractive institutions)를 다수의 참여와 권력 분산을 보장하는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s)로 전환하는 데 있다.
흥미롭게도 지금 한국 자본 시장은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과 기업 지배 구조 개선, 소액 주주 권리 강화, 이사회 책임 강화 등을 통해 수탈적 구조에서 포용적 구조로 이동하는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이 전환의 시기에 그리스도인이 율법주의적 결벽증에 사로잡혀 시장을 외면하거나 방관자로 남는 것은 책임을 유기하는 것과 같다.
시장의 규칙이 공정하게 작동하도록 목소리를 내고, 지배 주주의 전횡을 막으며, 자본의 흐름이 수탈적 방향에서 포용적 방향으로 재편되도록 분별력 있는 청지기로 동참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의 부정적 방향성이 긍정적 방향성으로 뒤집힐 수 있다. 완벽하게 깨끗한 금융 상품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되, 내가 가입한 연금과 금융 기관이 ESG 원칙2)을 준수하도록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고, 지역 사회와 협동조합, 사회적 금융 등 ‘사람을 살리는 자금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자원을 배정하는 과감한 실천이 요청된다.
1) ‘지대’(rent)란 본래 토지 임대료를 의미했으나, 현대 경제학에서는 어떤 자원, 권리, 지위, 능력이 희소하거나 쉽게 대체되지 않기 때문에 경쟁 시장에서 필요한 최소 보상을 넘어 발생하는 초과 수익을 가리킨다. 지대는 혁신과 위험 감수에 대한 정당한 보상일 수도 있지만, 독점, 특혜, 진입 장벽을 통해 얻는 비생산적 이익이 될 수도 있다(편집자 주).
2)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 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말로, 기업과 금융 기관이 수익성만이 아니라 환경적 책임, 노동·인권·지역사회에 대한 책임, 투명하고 공정한 의사 결정 구조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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