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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절차는 더디므로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처벌’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길 대신, ‘회복’이라는 가치를 붙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을 단시간에 바꾸어 놓는 일이 아닙니다. 교육은 한 사람의 삶이라는 물 항아리에 존중과 존엄의 가치를 표주박으로 조금씩, 차곡차곡 부어 주는 일입니다. ‘언젠가는 변할 수 있다’라는 한 사람의 잠재된 가능성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공간이 학교입니다. (본문 중)

 

이규철(박달중학교 교장)

 

드라마 <참교육>은 올해 상반기 넷플릭스 공식 시청 집계에서 세계 6위, 4,820만 뷰, 누적 시청 시간 5억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한국 넷플릭스 오리지널 가운데 ‘오징어 게임’ 시리즈 다음가는 성적입니다. 무엇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전 세계 사람들의 눈과 귀를 붙들었을까요. 답은 아마도 ‘사이다’일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학교 폭력 문제를 통상적인 절차가 아니라 강력한 공권력과 힘의 논리로, ‘고구마’가 아닌 ‘사이다’식 해법으로 다룹니다. 드라마 속 학교는 무기력합니다. 가해자들은 학교를 자신들의 아지트로 만들고, 교실은 마약을 유통하는 통로로 변하며,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조롱하는 공간이 됩니다. 학부모는 퇴근 시간 이후에도 교사에게 쉴 새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급기야 교실로 찾아와 학생들이 지켜보는 데서 교사에게 면박을 줍니다. 온갖 교권 침해를 당하면서도 교사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NETFLIX

 

어둠이 학교를 온통 뒤덮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마블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영웅’이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납니다. 그는 공권력의 ‘힘’으로 학교의 악을 소탕합니다. 대중은 현실에서 해소하지 못한 욕구를 이 장면들을 통해 풀어냅니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카타르시스’입니다.

 

이 드라마의 세계적 흥행은 학교 폭력과 교권 침해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인이 체감하는 절실한 삶의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열광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대중의 분노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폭력 사안 처리가 피해 학생과 그 가족에게 한없이 더디게 느껴졌던 순간들, 절차가 절차를 부르는 동안 정작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교실에서 가해 학생과 다시 마주 앉아야 했던 사례들, 교사의 정당한 교육적 지도가 무력해지는 현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차라리 누군가가 단번에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갈망을 만들었습니다. 삼십 년 가까이 학교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갈망 앞에 먼저 고개를 숙입니다. 학교가 더 빠르고 더 단단하게 피해자의 곁에 서지 못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와 현실은 다릅니다. 드라마는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현실을 과장하거나 압축합니다. 미디어는 보여 주고 싶은 면만 선택적으로 확대해 시청자의 확증 편향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학교의 부정적 측면을 극대화할수록 서사는 선명해지고, 시청자의 감정은 더욱 강하게 자극됩니다.

 

드라마는 그대로 재미있게 보면서도, 우리는 미디어가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지웠는지, 누구의 시선으로 현실을 재구성했는지, 시청자의 어떤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지를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이 얼마나 통쾌한가”에서 멈추지 말고, “왜 우리는 이러한 해결 방식에 통쾌함을 느끼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열광의 반응 이면의 몇 가지 주제를 함께 사유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정당한 폭력’ 서사의 위험성입니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방법과 절차를 무시한 채 가해자를 신속하게 응징할 때, 시청자는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폭력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순간, 또 다른 응징과 보복의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힘’의 논리가 교실에 들어오면 교실은 강자와 약자로 나뉩니다. 과정과 절차보다 결과에 집중하게 되고, 결국 힘의 서열이 학교의 질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역사의 되풀이되는 교훈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즉 좋은 목적이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공권력은 개인의 폭력보다 더욱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공권력의 정당성은 강한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절차를 지키고 시민의 존엄을 보호하는 데서 나옵니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긴급한 제지와 보복을 위한 응징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공권력의 역할은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사실을 공정하게 밝히며, 잘못한 사람이 책임을 이행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려 봅니다. 악의 평범성은 괴물과 같은 악인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사유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이 거대한 악에 가담하고, 그 악을 지속하게 한다는 통찰입니다. 교실의 폭력을 바라보는 데에도 이 통찰은 유효합니다.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소수의 가해자만이 아닙니다. 가해자의 행동에 웃어 주고, 못 본 척하고, “쟤는 원래 그래”라고 말하며 사유를 멈춘 다수의 방관자가 폭력을 지속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해법도 분명해집니다. 한 명의 영웅이 악인을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다시 사유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관자가 목격자가 되고, 목격자가 피해자의 곁이 되어 주는 것이 악에 대한 더 나은 대응법입니다.

 

둘째, 학교는 드라마보다는 더디지만 결코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학교는 철학도 시스템도 없는 껍데기뿐인 공적 기관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현실의 학교에는 학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제도와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생생활교육위원회는 학생의 문제 행동과 관련된 사안을 심의하고, 학생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도록 하며 필요한 조치를 결정합니다. 비폭력 대화와 회복적 생활 교육을 철학으로 삼은 학교에서는 대화 모임을 통해 갈등을 중재하고, 학생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친 영향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교권 침해 역시 더 이상 교사 개인이 홀로 감당해야 할 문제로만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교육지원청 교권보호위원회가 사안을 다루고, 악성 민원에 대해서도 교육청 차원의 대응 체계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차는 더디므로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처벌’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길 대신, ‘회복’이라는 가치를 붙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을 단시간에 바꾸어 놓는 일이 아닙니다. 교육은 한 사람의 삶이라는 물 항아리에 존중과 존엄의 가치를 표주박으로 조금씩, 차곡차곡 부어 주는 일입니다. ‘언젠가는 변할 수 있다’라는 한 사람의 잠재된 가능성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공간이 학교입니다.

 

셋째, 학교는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 회복의 서사를 빚어가는 공간입니다. 어릴 적, ‘초능력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아이들은 대뜸 ‘악인을 벌하고 착한 일을 하겠다’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우리 안의 근원적인 욕구가 ‘평화와 안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평화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가 한순간에 만들어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나와 너,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는 인격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 가는 평화입니다. 그런 평화는 학교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협의와 숙의, 그리고 그 지난한 시간의 축적이 만들어 내는 문화와 시스템, 곧 공동체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학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가장 시급한 과제는 학교 공동체의 회복을 통해 학교의 본질을 되찾는 일입니다. 학교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 주체가 만나 협의하고 결정하는 시스템을 학교 안에 안착시켜야 합니다. 소통은 잦을수록 자연스러워지고, 사람은 자주 만날수록 나눌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학교를 바꾸는 것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닙니다. 자신의 교실을 열어 보이는 교사,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학생, 다른 집 아이의 어려움에도 마음을 내주는 학부모가 학교를 바꿉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거창한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함께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실패하며, 다시 함께해 보는 경험이 쌓일 때 시작됩니다.

 

또한, 학교의 회복탄력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합니다. 여전히 선한 의지를 지닌 다수의 교사가 있습니다. 학교를 좋아하고 선생님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녀만을 챙기는 부모가 아니라, 옆에 있는 우리 반 아이의 이모와 삼촌이 되어 주려는 선량한 학부모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학교 공동체의 회복은 결국 교육 철학의 대전환을 뜻합니다. ‘경쟁’에서 ‘협력’으로, 파편화된 ‘개인주의’에서 서로 돕고 기여하는 ‘공동체’로, ‘성적’ 중심에서 ‘성장’ 중심으로, ‘징벌과 응징’에서 ‘화해와 중재’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 지향적 교육 철학이 확립되어야 하고, 그런 방향으로 교육의 대전환을 이루겠다는 공동체의 의지와, 그를 위한 평화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갖추어진다면, ‘사이다’가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분명합니다. 존중과 존엄의 가치를 표주박으로 차곡차곡 붓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부어 가다 보면, 우리가 그려 온 오래된 미래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우리 곁에 도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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