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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결코 윤리를 포기하는 교리가 아니다. 구원이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는 성경적 선언이며, 값없이 받은 칭의는 구원의 끝이 아니라 구원받은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복음은 값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고, 그 감사로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이 믿음의 열매로 나타난다. 멜란히톤은 은혜의 복음을 지키면서도 성도의 윤리적 책임을 분명히 세워, 종교개혁을 방종의 위기에서 건져 냈다. (본문 중)

 

류성민(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성가교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면,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는 이 질문 앞에 서 왔다. 은혜를 강조할수록 삶의 책임이 가벼워 보인다는 의심이다. 이 의심에 답하면서 은혜의 복음과 윤리적 삶을 함께 붙든 인물이 필립 멜란히톤이다. 그는 은혜를 강조한 루터와 윤리를 요구한 에라스뮈스 사이에서 두 사람의 문제의식을 종교개혁의 원리 위에서 균형 있는 성경적 답으로 정립해 낸 신학적 윤리의 중재자였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하면서도, 사람의 선행이 더해져야 구원에 이른다고 보는 신인협력적 성격을 띠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런데 당시 교회에서는 7성사1)에 참여하는 일이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며 공로를 쌓는 가장 확실한 길로 이해되었다. 그 결과 이웃 사랑이라는 윤리적 삶보다 성례 참여가 앞서게 되었다. 비중은 달랐지만, 율법을 지켜 선행을 쌓는 일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전제는 같았다.

 

ⓒPixabay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전제를 거부했다. 원죄로 부패한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 준수로는 의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율법과 복음을 분명히 구분하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지할 때 값없이 칭의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하나님 사랑의 표현으로 성례에 참여하든지, 이웃 사랑의 표현으로 윤리적 선행을 행하든지, 칭의를 얻는 데에는 어떤 공로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루터가 선행 자체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선행을 믿음의 열매로 강조했다. 그러나 이 열매로서의 선행을 신자의 삶에 어떻게 세울지에 관한 신학적 논의와 실천적 대처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에라스뮈스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그는 교회의 윤리적 부패를 비판한 인문주의자였지만, 구원의 원리에서는 전통적인 신인협력설을 지켰다. 『자유의지론』(1524)에서 그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한 삶을 명령하고 권면하신다는 점을 근거로, 사람의 의지가 구원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행이 구원과 무관하다면 하나님의 명령과 그가 내리시는 상과 벌이 모두 의미를 잃는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그는 루터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심어 윤리적 방종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루터는 『노예의지론』(1525)으로 반박했으나, 방종의 위험을 막을 구체적 대안은 곧바로 내놓지 못했다.

 

에라스뮈스의 경고는 기우에 그치지 않았다. 멜란히톤이 참여한 1527년 작센 교회 시찰에서 개혁의 현실이 드러났다. 목회자들은 기본 소양이 부족했고, 신자들은 복음적 자유를 오해하여 성례와 윤리적 삶을 소홀히 했다. 성례와 선행으로 공로를 쌓던 전통적 규범이 사라지자 신앙과 삶의 구체적 지침도 함께 사라졌고, 복음의 은혜는 무책임한 방임으로 변질되었다. 복음을 구실로 율법을 폐기하려던 반율법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신칭의2)가 윤리적 방종을 낳는다는 비판이 종교개혁 진영 안팎에서 힘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위기 속에서 멜란히톤이 중재자로 나섰다. 그는 루터와 함께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며, 이신칭의의 핵심을 지키는 동시에 에라스뮈스가 제기한 윤리의 문제에 답해야 했다. 먼저 1528년 『시찰자 교육』을 통해 강단에서 십계명을 다시 가르치도록 규정했다. 같은 해 『골로새서 주석』 개정판에서 율법관을 새롭게 정립했다. 훗날 율법의 제3용법(tertius usus legis)이라 불리게 되고, 개혁파 신학 전통의 윤리적 핵심 교훈이 될 개념이 이 주석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멜란히톤에게도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었다. 율법은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에게 율법은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 남는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연약함과 죄의 잔재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분별하는 기준은 여전히 필요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을 행하기 위한 규범으로서 율법의 가치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렇게 하여 율법은 구원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로 순종하며 걷는 길이 되었다.

 

이 율법관은 두 방향의 위험을 동시에 피했다. 율법 준수로 의를 쌓으려는 중세의 공로주의로 돌아가지 않았고, 은혜를 핑계로 율법을 무시하는 무율법주의에도 빠지지 않았다. 은혜와 율법의 관계를 성경적으로 균형 있게 세운 것이다. 멜란히톤의 이 통찰은 이후 개혁파 신학에 계승되어, 율법을 구원받은 사람이 감사의 표현으로서 자발적으로 순종할 규칙으로 이해하는 개혁파 윤리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는 결코 윤리를 포기하는 교리가 아니다. 구원이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는 성경적 선언이며, 값없이 받은 칭의는 구원의 끝이 아니라 구원받은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복음은 값없는 은혜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고, 그 감사로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이 믿음의 열매로 나타난다. 멜란히톤은 은혜의 복음을 지키면서도 성도의 윤리적 책임을 분명히 세워, 종교개혁을 방종의 위기에서 건져 냈다. 멜란히톤의 통찰은 오늘날 신앙과 삶의 일치를 고민하는 한국 교회에 값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지 않는 분명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1) 가톨릭의 7성사에는 개신교가 인정하는 세례와 성찬(성체성사) 외에 견진(입교와 유사함), 고해, 병자(병자를 위해 기름을 바르고 기도함), 성품(교회 지도자를 세움), 혼인 성사가 포함된다(편집자 주).

2)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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