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슬기로운 청년들에게 묻는다.
<청년포럼: 한반도 평화, 청년의 온도> 정재훈 회원 발제문 요약
북한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통해 많이 듣는 말은 최근 북한의 변화 속도가 한국보다 더 빠른 것 같다는 것이다.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배급제가 무너진 후 ‘내 삶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급속도로 퍼져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내 삶은 내가 지켜야 한다’ 이거 진짜 많이 들은 말이 아닌가! 그래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안정된 직장’을 구해야 하고 ‘자기 집’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이런 마당에 누가 누구에게 ‘이기적이다’ ‘자기 밖에 모른다’ ‘자기 행복만 추구한다’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일이 분단에 기인한 것이라 해도, 한반도의 정세가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을 주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에 다소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당장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당면한 과제가 버겁다. 분단 상황을 보고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는 사명자 혹은 오타구적 열정으로 한반도 이슈에 관심이 충만한 친구들, 나와 같은 이해관계자가 아닌 이상 ‘남북관계, 한반도의 평화’와 같은 이슈에 큰 관심을 두기 어렵다. 삶이 고단할수록 그런 외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버겁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청년들은 어떻게 슬기로운 생활을 누릴 것인가?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슬기로운 청년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 삶의 고단함이 한반도 평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좀 나아진다고 곧바로 평화에 대한 관심이 더불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좀 더 넉넉하고 여유로울 수 있다면, 이 주제를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 이슈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북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 관한 것이다. 본인 또는 부모가 북한에서 와 북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은 자신의 배경이 노출되는 것을 굉장히 꺼려한다. 또한 이런 아이들이 많이 있는 학교에는 이 아이들을 위하여 북한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한 분씩 있다. 이분들이 맡고 있는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교무실로 전화를 걸어 ‘학교에 북한에서 온 선생님이 있나요?’ 물으며 불편해하는 학부모님들도 있고 북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심지어 자녀를 조용히 전학시키는 사례들도 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와 닿지 않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북한 출신 교사에게 아이들의 수업을 맡길 수 있을지? 또는 북한 배경을 가진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까?
종종 국제뉴스를 통해 ‘분리독립’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하나였던 나라에서 분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의 경우도 향후 어떤 모양으로든지 체제가 통합된다거나 군사적 충돌의 위험이 없는 평화체체가 구축된다고 해도 그것은 외연상의 평화일 뿐이다. 그것은 시작점일 수도 있지만, 완전한 평화를 이루려면 제도적 차원 이슈 외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단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라는 유네스코 헌장의 정신처럼 평화는 국제적, 정치적 이슈 이전에 마음의 문제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할 때 국제사회는 대북제재의 강도를 높이고 미국과 우리는 사드를 추가 배치하고 폭격기를 띄우며 군사적인 무력시위가 뒤따른다. 궁극적으로 북핵을 잡을 수 있는 건 사드 미사일이 아니라고, 사랑의 원자탄뿐이라고 믿고 있지만… 불편한 한반도 뉴스를 접할 때,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지만, 대답하기란 너무 어렵다. 슬기로운 청년들에게 평화를 위한 지혜를 구한다.
*이글은 열매소식지 제264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