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가치세미나 – 미투와 기독교
[최순양, 김애희 발제문 요약]
#MeToo, 기독교의 시선으로 보다
최순양 교수(이화여대)
제도화된 기독교가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
한국사회에서 일고 있는 me too운동을 보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과연 교회에서는 제대로 형성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고, 만약 부정적인 대답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자각의식의 부재에서 제일 먼저 찾아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 성서, 신앙 고백적 교리들에서 여성을 2차적 존재로 여겨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 중에 그리 많지 않다.
교리나 신조, 기독교의 철학과 신학을 형성하고 있는 사상들에 여성 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 많은 경우, 이러한 문제제기(여성은 교회에서 차별받고 있다)를 할 경우, 반 기독교인이 되거나, 신성 모독적 입장에 서 있다고 여겨질 때가 많은데, 그것은 교회의 질서 즉 가부장적 질서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질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객관화된 시각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을, 즉 성폭력이나 차별 등의 현상에서 피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편들어주고 지지하며 지키기 위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주인공은 목사나 지도자가 아니라 평신도 하나하나라는 것, 그래서 그 구성원 중에 어느 하나라도 깨지거나 실족하게 되면 그 공동체 전체가 위기에 처한 것이라는 인식이 없이는 기독교에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종류의 사회 구조적 악에 대해서 그것을 멈추고 해결할 의지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없을 경우, 일반사회에서 피해자에 대해 2차 3차 피해를 입게 하는 것처럼, 아니 그 보다 더 피해자인 여성을 비난하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려는 현상은 교회에서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목회자 위주의 사고방식이나, 남성이 여성보다 더 중요하고, 기독교적 인간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한, 교회 내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더 공동체에서 주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로 여겨지며, 오히려 그들을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사람들로 비난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대안 : 여성을 주체로 보는 제도적 장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가 여성에 대해 차별적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야, 여성들이 부당하게 대우받거나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것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피해자의 증언과 고발에 공감하며, 다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동참을 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2,3차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서 자신의 성폭행 사건을 드러내거나 고발하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더 어렵고 복잡하지만, 피해자들이 고발을 한다고 해도, 피해자들과 동참하며 함께 하려고 하는 구성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에 대해 공동체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기구와 제도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감리교의 경우에는 양성평등위원회와 성폭력소위원회를 만들어서 연회에 정식 기관으로 등록하며, 실질적으로 피해사례가 있는 경우 가해자를 만나 압력을 행사하고, 연회에서 목회자에게 적절한 징벌을 내리도록 하는 모임을 구성하고, 대안을 마련해나가고 있다.
교회 전체가 성폭력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을지라도, 교회 내 성폭력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한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모임과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서 일고 있는 ‘믿는 페미’나 ‘갓 페미’ 등의 모임을 통해 여성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하면서 교회를 바꾸어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여성들이 모임과 독서토론 등을 하고 있는 현실 또한 낙관적이라고 생각해 본다.
#WithYou, 기독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김애희 사무국장(교회개혁실천연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혐오가 되고,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지는가.
성폭력, 차별, 여성혐오의 문제는 이제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공공장소에서 차별적 발언이나 행위에 대한 제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가 조성되어 가고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차별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신학적 교리와 성서 해석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여성 스스로 차별을 내면화하도록 작동해왔다. 또 교회는 하느님의 의지와 무관한 위계질서와 차별 구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켜왔다. 늘 ‘예’라고 답하는 ‘착한 종’만이 교회 공동체에 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양산했다. 성폭력은 학교나 직장, 종교기관 등 위계구조를 강조하는 집단에서 많이 발생한다. 교회의 성폭력은 낮은 성평등 감수성에서 자란 암세포와 같다. 죄의식 없이 범죄가 저질러지고, 공동체는 이를 범죄로 인지하지 못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더 큰 상처를 받고,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한국교회를 지배해온 가부장적 질서와 차별적 문화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성폭력 문제는 늘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은 필연적으로 권력구조에 대한 성찰로 연결된다. 개인윤리나 덕목만의 문제로 해결되기 어려운 사회 구조적 권력관계를 고민하도록 만들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착취할 기회가 주어지면,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과 연대하는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다면 말이다.
피해 입지 않을 권리, 차별하지 않을 권리로 이해
교회는 흔히 자신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금의 교회는 빛과 소금은커녕 사회적 진보에 역행하기 일쑤이다. 성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보수적 교리와 왜곡된 유교관이 혼재된 교회현장에서 여성은 남성지도력을 수발하는 존재로서의 ‘자매님’만을 필요로 한다. 그간의 한국개신교 역사는 죄인을 양산하여 교세를 키웠고, 더 이상의 외적성장 동력을 상실한 지금에는 동성애자와 같은 가상의 죄인을 만들거나 내부 고발자와 같은 이단자를 만들고는 결집과 체제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최근 사회적 통계는 이와 같은 시도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향적 각성이 없는 한, 한국 개신교의 미래는 없다. 그리고 전 사회적으로 교회가 요구받고 있는 전향적 각성의 주제 중 가장 우선순위에 속한 것이 바로 성폭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다. 그간 교회는 은폐를 통해 성폭력을 조장했고, 두둔을 통해 가해자를 응원했으며, 침묵 강요를 통해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제라도 교회는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구체적 변화의 행동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회는 안전한 공간입니까? ‘미투’가 만들어낸 질문들에 이제 응답할 때다.
*이글은 열매소식지 제264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