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이었다. 이들 지역은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운동을 일으켰고, 두 지역은 목사가 주도했다. 사흘 째 되는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개성, 사리원, 수안, 송림, 곡산, 통천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본문 중)

[이만열 교수의 3.1운동 100주년 기념 강연](전문)

3.1운동과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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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1](기윤실 창립발기인, 전 국사편찬위원장)

차례

– 3.1운동 개관

– 3.1운동이 일어난 원인과 배경

– 3.1운동의 의의

– 3.1운동과 한국교회

–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

– 맺는 말

3·1운동 개관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을 비롯하여 전국 8~9 지역에서 동시에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시작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그 뒤 1년여 동안 계속된 국내외의 항일 민족독립 운동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운동은 지역과 계층, 종교와 이념, 남녀와 노소를 초월하여 이루어진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중요한 항일 독립운동으로, 초기의 운동 주체가 종교인들이기 때문에 그 종교사적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출발시킨 ‘3·1혁명’으로도 간주되기 때문에 그 정치사적 의미 또한 매우 크다.

3월 1일로 거사 일자를 정한 것은 1919년 1월 22일에 돌아가신 고종의 장례일을 3월 3일로 정한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고종의 ‘독살설’까지 나도는 상황에서 울분에 쌓인 백성들이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모였기 때문에 3월 3일 인산일(因山日) 전후를 고려한 것이다. 실제 서울역 하차 인원이 평소에는 매일 평균 1,500~1,600명이던 것이 2월 26일 3,000여명, 27일 6,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장례일 전날은 주일이어서 기독교인들을 배려하느라 3월 1일로 정했다. 천도교 측의 배려가 컸다. 당일 낮 12시 경부터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모이기 시작, 오후 2시까지 길선주·유여대·정춘수·김병조 4명을 제외한 29명이 참석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을 통고했다.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대표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에 나서게 되었다.

 

파고다공원에서 3.1운동 참가자들. ⓒ국사편찬위원회

 

이날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이었다. 이들 지역은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운동을 일으켰고, 두 지역은 목사가 주도했다. 사흘 째 되는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개성, 사리원, 수안, 송림, 곡산, 통천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4월 말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가 점차 퇴조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 군경의 탄압이 가혹한 데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회는 하루에 67회나 일어난 4월 1일을 정점으로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일어났다. 50회 이상 일어난 날만 3일이었고, 30회 이상 일어난 날도 15일이나 되었다. 시위 참가자는 서울의 수십만을 비롯하여 의주 3만, 강화읍 2만, 합천 삼가 1만 명 등에 이르렀는데, 이 통계는 일제가 50명 이상의 시위를 조사한 데 따른 것으로, 그 통계에 따르면 1919년 3~4월에는 1,214회 시위에 110만 명이 참가했고, 1919년 3~5월은 1,542회에 202만 명이 참가했으며, 전국 218개 군 중 212개 군이 참가했다고 했다. 일제의 경찰 통계와는 달리 2천여 회가 넘었다는 기록도 있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년간 1천만 명이 참여했다고 증언한다.

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에 따라,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일제의 총검에 의한 무차별 살육으로 한국인 사상자가 많이 났다. 일제 측 통계에 의하면, 그 해 3~5월까지 46,948명이 체포, 투옥되었고, 2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미결수 혹은 기결수로 수감되었으며, 15,900여 명이 부상당했고, 7,500여 명이 살해당했다.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학교, 그리고 715채의 한국인 민가가 소각 당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원인과 배경

폭력에 의해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와 정치, 사상의 자유를 박탈했고 생존권을 위협하고 한국인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치안 대책으로 태형을 부활시키는 등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겁박했다. 1911년 1만 8천여 명에 달하던 즉결처분이 1918년에는 8만 2천 명으로 늘어났고, 동맹파업도 1916년에 6건에 362명이던 것이 1918년에는 50건에 4,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쌀값이 1914년에 평균 1석당 평균 15원 선이던 것이 1917년 말에는 20원 선이 넘었고, 1919년 3월에는 40원을 상회하게 되었다. 이는 일제 강점 초기, 식민지 백성의 삶을 옥죄고 있는 사회 경제적으로 비참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18년에 끝난 세계 1차 세계대전은 피압박민족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 원칙’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 및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유럽의 백인 기독교도들에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8개국 유럽 나라들이 해방과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비백인, 비기독교도 식민지 민족에게는 이 민족자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심지어 베르사이유 조약안 440개 조항 가운데 조선 문제는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이처럼 민족자결 원칙이 현실적으로 전승국 식민지에 적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은 전승국 제국주의자들의 의도에 개의치 않고 세계사적인 반전을 기하려고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자결’이라는 복음을 “제 것으로 만들려고 용감히 일어선 최초의 민족이 우리 민족”이요 이 원칙을 자기의 운명에 적용시켜 궐기한 최초의 봉화가 3·1운동이었다(노명식).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세계사의 움직임을 간파한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중국에 망명한 여운형 등은 1918년 8월 20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해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른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논의,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을 상해로부터 출발시켰다. 김규식은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여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독립청원서와 한국독립항고서 등 여러 문서들을 작성,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했다. 그 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의 신분은 신한청년당 대표에서 임시정부 대표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1919년 10월 11일).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wikipedia

 

상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다는 소식은 독립운동계를 고무시켰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와 일본, 만주와 노령 지역에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고무했다. 선우혁은 국내에 들어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서북지방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논의했다. 일본에도 대표를 파견,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이광수는 2·8독립운동의 선언서를 작성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한편 여운형 등은 만주와 연해주를 방문,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고양했다. 이리하여 3·1운동 직전에 간도 노령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발표된 것은 3·1운동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목되는 바는 3·1운동이 종교계를 중심으로 준비되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 후 대부분의 언론․사회단체가 해산된 가운데 민족운동을 이끌 수 있는 마땅한 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종교단체는 집회가 가능했고 교단마다 산하 지방 기구가 조직되어 있었다. 천도교의 경우 1905년에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명(改名)한 이래 전국적인 대조직을 갖고 있었다. 장로회는 1912년 9월에 총회가 조직되었고 지방에 9개의 노회가 있어 총회→노회→시찰회→당회의 조직으로 연결되었으며, 감리회의 경우, 북감리회는 연회 산하에 10개의 지방회, 남감리회도 연회 산하에 7개의 지방회를 갖고 있어 연회→지방회→구역회로 연결되는 조직망이 있었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2월에 들어서서 각기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2월 중순부터 합작이 진행되었다. 천도교와 불교의 연대에는 최린과 한용운의 노력이 컸고 기독교와의 연대에는 105인 사건 이래 민족운동으로 촉망받던 이승훈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 강점 하에서 종교기관만이 ‘치외법권적으로’ 유일하게 합법적인 집회활동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종교계가 3·1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주목할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경계했던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의 강조가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전에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운동, 농민운동으로 분화되었던 민족운동을 하나의 새로운 독립운동의 동력으로 만들었다.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독립투쟁이 가속화하였는데, 북간도에서는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고, 1920년에 들어서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로 독립운동은 러시아와 중국 관내에까지 파급되고 미주 지역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국내의 민족운동에도 큰 힘을 불어 넣어, 고등교육을 위한 민립대학 기성회의 조직을 비롯하여 조선산 물품 애용과 근검․절제운동 등의 실력양성 운동,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등 다각적인 운동을 일으키고 한민족을 깨우치고 독립을 준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3·1운동이 한국 민주화 운동에 끼친 영향이다. 종래는 3·1운동의 독립운동으로서의 성격만 강조되고, 민주화 운동의 측면은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3·1운동은 한국사에서 민주공화제 국가를 탄생시키는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3·1혁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한반도에서 백성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고려시대에도 민중(노비)들의 신분해방 운동이 없지 않았으나 주체로 등장하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 양반층의 세도와 부패에 민중들은 ‘민란’ 형태의 농민운동을 일으켰는데, 1862년 ‘임술민란’을 포함하여 한 해 37건의 대소 농민운동이 일어났고 그런 저항들이 온축되어 폭발한 것이 1894년의 갑오농민혁명이다. 그 뒤에도 민권 신장을 위한 독립협회 운동도 있었으나 지배자들은 오히려 황제권을 강화하는 대한제국의 탄생으로 역사 흐름을 역행시켰다. 그러나 3·1운동은 그 전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양반 지배자 중심의 왕조적 질서를 걷어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독립운동도 3·1운동 이전에는 옛 왕조를 회복하겠다는 의미의 ‘복벽(復辟)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대동단결선언」(1917)에서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다”라고 천명하면서 국민주권의 이론을 정립했고,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대한독립선언서」(1919.2)와 「2·8독립선언서」(1919.2) 역시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했으며, 「3·1독립선언서」에서도 새로 세울 나라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民主)’의 나라임을 분명히 했다. ‘민주’의 나라가 세워졌다는 의미에서 한민족은 출애굽을 시작했고, 민족적인 새 생명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3.1독립선언서 원문. ⓒwikipedia

 

3·1독립선언의 결과로 1919년 4월 11일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나라를 수립했다. 과거 황제의 나라였던 ‘대한제국’은 ‘백성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기에 선진들은 이러한 투철한 역사의식을 반영하여 ‘3·1운동’을 ‘3·1혁명’이라 불렀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중의 나라’ 즉 ‘민주공화국’은 3·1운동의 독립 선언에서 추구했던 이상이었다. 3·1운동의 민족 지도자 이승훈 등은 재판 과정에서,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느냐는 일제 재판관의 질문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3·1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민주공화정 이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10개조로 요약된 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1910년에 멸망한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임시정부(행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도 두어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을 확립할 수 있는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3·1운동은 그 세계사적 의미도 크다. 3·1운동은 1차 세계대전 후 강대국 중심으로 재편된 새로운 세계 질서라 할 베르사이유 체제에 저항한 약소민족 최초의 운동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생탈을 목적으로 한 유럽권 내의 전쟁이며 이를 계기로 비유럽권인 미국과 소련에 그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체제는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전승국이 그들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 질서로서 전승국 식민지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서는 전승국이었다. 이 때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전승국 일제에 항거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 중심의 침략․강권 질서에 도전했던 것이다.

3·1운동은 당시 피압박민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전승국 중심의 침략·강권적 국제질서 재편에 도전한 운동으로서, 이에 자극받은 세계의 피압박 약소국가들이 그들의 민족해방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효시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해 북경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5·4운동을 일어났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조선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쳤다.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를 중심으로 영국에 대한 인도의 독립운동이라고 할 비폭력․무저항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일어났고, 필리핀․베트남․이집트 등지의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의미에서 3·1운동은 그 세계사적 의의도 높다고 말할 수 있다.

 

3·1운동과 한국교회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천도교 불교와 제휴하여 이 운동을 선도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선도적 참여에도 불구하고 역사의식의 결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나아가 3·1운동 후에 훼절한 기독교 인사들 때문에 기독교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3·1운동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처음에 독립청원을 내자고 했으나 천도교와의 합작과정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했다. 천도교 측도 독립청원과 독립선언 의견이 혼재하다가 독립선언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또 다른 종교와의 합작에 동참할 수 있는가, 목회자가 정치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회의한 기독교 지도자가 있었고, 3월 1일 당일 선포식에 참석하지 않은 4명이 모두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신석구 목사와 오화영 목사는 다른 종교와의 합작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참여했고, 오기선은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런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당시 소위 조선의 원로였던 윤치호 김윤식 같은 이들이 독립불능론, 시기상조론 등을 언급할 때,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공판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3·1운동은 준비·점화 단계에서 전국적인 만세운동 단계, 그리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모색하는 정리 단계 혹은 국가건립 단계로 진행했다. 우선 준비·점화 단계에서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은 거사 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고 거사에 따른 업무도 분담했는데,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 측에서 맡고, 지방 분송은 기독교 측과 협력키로 했고,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귀족원에 전달하는 업무는 천도교 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이 맡았다. 독립선언 서명자를 모집키로 하여 16명의 기독교인이 서명했는데 5명이 더 서명자로 지원했으나 시간이 늦어 취소되었다. 점화 단계의 주도자 48인 중 24명이 기독교인이다. 천도교와의 합작에 앞서 기독교계는 적어도 세 갈래(서북 장로교, 북감과 남감, 2·8독립선언에서 보이는 재동경Y)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첫날 봉화를 든 것은 기독교계였다. 그러나 중앙 조직이 약한 기독교계가 천도교로부터 5천원을 빌렸지만, 5천원의 용도는 대부분 여행 경비(중국 일본 만주와 국내 3,170원, 수감자 가족 생계비 640원, 독립선언서 발송비 250원, 기타 경비 80원)에 사용되었다. 오늘날에 와서 한국 기독교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비용을 한국교회가 천도교에 갚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지방화·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예를 들어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7곳이 대부분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하였다. 천도교 측과의 합작도 보인다. 운동의 주동 세력이 뚜렷한 경우가 340곳인데 그것을 지역으로 정리하면 311개 지역이다. 그 중 기독교 주도가 78지역, 천도교 주도가 66지역, 그리고 양교 합작 지역이 42개 지역이다. 이것만 가지고 본다면 기독교 참여 지역은 25%-38%에 이른다. 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인의 참여 정도는 체포·투옥자 수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며,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비율이 바로 기독교인의 3·1운동 참여의 정도를 계량화한 숫자이다. 이와 관련, 지방의 자료를 보면 투옥자나 복역자 가운데서 기독교인 여부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위에서 언급한 통계를 당시 한국인의 인구와 관련시켜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이 더 분명해진다. 이 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기독교인은 1918년 말 현재 21만 2,700명(장: 160,913, 북감:41,044, 남감:10,740)으로 나타나는데, 인구의 1.3∼1.5%였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수는, 주동 세력에서 25∼38%, 체포·투옥에서 17∼22%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체포·투옥된 숫자에서 보면,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참여는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 당시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3∼1.5%에 불과했지만, 적극적인 3·1운동 참여에서는 20%를 상회했다면, 3·1운동과 한국교회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를 다시 천도교의 교세와 비교해 보자. 1919년 3월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법정 진술에 의하면(그러나 이 진술은 신뢰성이 낮다), 천도교의 교세는 명부 등재자 300만 명, 의무 부담자 200만 명이었다. 그의 진술대로라면, 이는 기독교의 10배에 달하는 교세다. 거기에다, 천도교는 19세기 말 이래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흐름인 민중사상계[東學]를 이끌어 온 세력으로서 사상 면이나 교세 면, 그리고 민중 동원 능력 면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3·1운동에서 활동한 역량은 교세가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기독교보다 절대적인 수치에서 뒤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반대로 기독교가 이 운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일제로부터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제암리 교회당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목사·장로는 134명으로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수 1,024명 중 13%)이나 되었다. 총회에 보고한 노회의 보고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이 전국화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3월 1일 선언 당일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 불참하였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또 당일 서울의 선언 발표 장소를 태화관(泰和館)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다. 끝으로 당시 장로교·감리교 연합기관지인 〈기독신보〉등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 검열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

이처럼 기독교가 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기독교의 민족관이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교육이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다. 무엇보다도, 한말 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민족운동의 전통을 적극 참여의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기독교 국가의 침략을 당하였으나, 한국은 일본이라는 비기독교 국가에 의해 침략을 당함으로써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가능했다.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을사늑약이 이뤄진 1905∼1910년 사이에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는 을사늑약 파기운동과 관련하여 엡웟회(懿法會)의 활동,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대한민 앞의 상소운동(이준 등), 정동교회 교인 정재홍과 양주 교인 홍태순의 순국 자결,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 저격, 안중근(가톨릭)·우덕순(개신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한말의 기독교 민족운동의 이런 전통을 독립협회→상동파 및 황성기독교 청년회→신민회→105인사건→신한청년당 및 송죽회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운동의 흐름으로 보고 이런 전통 위에서 3·1운동이 전개된다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1907년 종로에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현 YMCA).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또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화가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점은 앞에서 간단하게 지적했다. 또 일제가 강점한 후 기독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적인 자유마저 박탈하려 했다. 특히 금주·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다 강점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이었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 학교의 성경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을 위협에 더하여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우리는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행동에서 그들의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사적 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3·1운동의 만세 시위가 한창일 때, 기독교회가 작성한 「독립단 통고문」을 뿌렸다. 그 내용은 ①매일 3시에 기도하고, ②주일은 금식하고, ③매일 성경을 읽는데, 월요일-사 10(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렘 12(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 수요일-신 28(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약 5(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와 인내를 권면), 금요일-사 59(죄 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롬 8(성령이 주시는 생명,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등이었다. 여기서 기독교회가 민족운동을 신앙고백 위에서 신앙운동과 함께 진행시킴으로써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것을 보게 된다.

 

맺는 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한국교회는 신앙의 선조들의 그런 신앙과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지 숙고해야 한다. 3·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역과 계층, 종교와 이념, 남녀와 노소를 초월하여 전개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특히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연대하여 이 거대한 운동을 폭발시켰다. 종교 간의 이런 연대와 협력은 지금 한국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3·1운동에서는 일제의 침략 강점을 물리치고자 했는데, 해방 70여년을 넘긴 우리는 외세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 「3·1독립선언서」는 분명히 한국의 자주국임과 한국민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오늘의 상태를 보는 한국교회의 혜안이 필요하다.

3·1운동과 「3·1독립선언서」는 평화를 강조했다. 다음은 그 일절이다.

이천만 함분축원의 백성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소이가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 동양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와 시의를 갈수록 농후케 하여, 그 결과 동양전국이 공도동망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백하니,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나와 동양지지자의 중책을 온전케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몽매에도 면치 못하는 불안공포로부터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로써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오늘 날 한국의 분단은 주변 나라들의 평화 및 안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한민족의 완전 자주독립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이 세계에 줄 수 있는 귀한 선물이 한반도의 평화통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3·1운동 100주년의 의의를 이 민족의 분단적 삶을 평화적으로 극복해 가는 데에서 구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조국의 완전 자주통일·독립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선진들을 되돌아보면서,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이라는 지향과 세계봉사라는 더 높은 가치를 마음에 품기를 기대한다.

[1](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발기인이며 이사로 활동했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제8대)을 역임했다.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상지학원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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