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으로 장기 복역한 자들은 대개 종교인이었으므로, 이들은 감옥에서 성경이나 경전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지냈기에 다른 죄수들보다 잘 견딜 수 있었다. 길선주는 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보냈는데, 특히 요한계시록을 800독 하면서 고난의 시기를 잘 인내할 수 있었다. 석방 후 그의 말세론은 1970년대 이후 타세적이고 교회성장만 추구한 부흥사들의 종말론과는 격이 달랐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1919년 3월 1일 행적에 대한 부정적 언급
일부 민족주의자들 중에 33인 중 한 명인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吉善宙, 1869. 3. 25-1935. 11. 26) 목사가 3월 1일 태화관 모임에 참석했으나, 중간에 소변을 보러 나가는 척 하면서 도망을 쳤기 때문에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어서 친일 목사가 되었다고 비판한 이들이 있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길 목사가 선언서에 찍을 도장만 빌려주고 사경회를 핑계로 선언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비판해 왔다. 전자는 악의적 왜곡이고 후자는 사실에 대한 부분적 이해이다.
독립지사로 나중에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한 이일구(李鍾律, 1902-1988)는 1926년 투옥되어 옥중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을 만나 독립선언식 날 길선주의 행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들었다고 썼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당일 태화관에 모인 민족 대표들은 선언문을 가지고 논란을 벌였다. 선언문이 완성되자 만해가 그것을 읽고 해설했는데, 이어 총독부 경무국에 전화하여 독립선언 사실을 통보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 측 대표 일인인 길선주 목사는 소변보러 간다 하고 그 자리에서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길 목사는 ‘소변 목사님’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1]
다음 항에서 보듯이 3월 1일 길선주는 서울역에 늦게 도착하여 태화관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왜곡을 했을까? 1926년이면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이 가장 맹렬하던 때였다. 사회주의자 이종률은 예수교에 대해 혐오감을 가졌음에 틀림이 없다. 한용운이 길선주가 선언식에 불참했고, 나중에 독립 청원론으로 인해 무죄로 석방된 일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했을 수는 있지만, 과연 소변 운운 했을지는 의문이다. 이종률이 길선주 목사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평양 기독교를 대변하는 목사였고, 1927년부터 청년들로부터 배척받는 보수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발단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장대현교회 내 남녀 간 벽을 허물자는 청년층의 요구를 길 목사 등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1928년 봄 길선주는 사경회 때 임박한 전쟁 발발을 예언함으로써 경찰법 위반으로 안동경찰서에 체포되어 29일간 구류를 살았다. 『중외일보』는 길 목사가 우매한 교인들에게 『정감록』 수준의 거짓 예언과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자라고 부정적으로 보도했다.[2]
길선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무장의열 독립운동의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폭파사건의 주역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까지 역임한 조문기(趙文紀, 1927-2008)는 길선주를 “악질적 친일”파로 몰았다. 그는 자신이 광복회 경기지부장으로 있는 8년 동안 삼일절 행사에서 33인의 이름을 호명하는 식순에서 “악질적인 친일 행적이 드러난 5인 이갑성, 최린, 박희도, 길선주, 정춘수”의 이름은 빼버렸다고 했다.[3]
이 두 사람은 신민회, 의열단 계열의 사회주의자들로 평양 예수교회를 대변한 길선주의 행적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삼일운동 조직기에 천도교 측은 폭력적 항거를 주장했고, 기독교 측은 평화적 청원론 입장이었는데, 삼일운동 이후 천도교-사회주의자 측은 국내 기독교의 온건론 노선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들은 1925-26년에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하면서 평양과 선천 등의 예수교를 미제의 앞잡이나 한반도를 종교 환원주의로 만드는 자들로 비판했다.[4] 그 이후 사회주의자와 예수교인 사이의 골은 더 깊어졌고, 해방 이후까지 위와 같이 왜곡된 사실도 서슴지 않고 책에 썼다. 아무런 근거 없이 길선주에게 악질적 친일 행위가 있었다는 가짜 뉴스가 생산되었다.
실제 3월 1일 길선주의 행동
길선주는 2월 20일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린 후 평양을 떠날 때 서울 선언식 날짜는 몰랐으나 참석할 계획은 가지고 일단 황해도 장연에 사경회로 갔다. 눈이 흐려 잘 보이지 않던 그는 선언식에 제 때 못 갈 수도 있으므로, 선언서에 찍을 도장은 미리 빌려 준 터였다. 1주일간의 사경회에 참석한 뒤, 그는 2월 28일 오전 8시 사리원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그러나 기차는 예정보다 늦게 3월 1일 오후 6시에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33인(실제로는 29인 참석)이 회집한 서울 태화관 모임에는 불참했다.[5]
독립선언서 연명자 중 동석치 않았던 吉善宙 金秉祚 劉如大 鄭春洙의 4명을 제한 전원은 독립선언과 시위가 벌어진 후 집합소인 명월관 지점에서 경성의학전문학교 생도 서영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에게 독립선언을 통고한 후 몰려 온 일경에게 자진 피체되었다.[6]
3월 2일 경찰 심문조서를 보자.
나는 어제 오전 8시에 사리원에서 기차에 타서 오후 6시에 남대문역에 내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우리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어 갔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곧 이곳(경무총감부)으로 오게 된 것이다. 동지들이 어제 오후 2시에 선언서를 발표한다고 하는 말을 장연에서 박인관에게 들어서 경성으로 오게 된 것이다.[7]
3월 18일에 서대문감옥에서 진행된 검사 신문 조서에서도 자신은 27일 정오 즈음에 평양으로부터 안세환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1일 서울에서 선언식을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장연을 출발하여, 도중에 사리원에서 1박하고, 이튿날인 1일 오후 6시 경성에 도착하였는데, 군중들이 독립선언을 한 이들이 모두 체포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명의를 낼 것을 승낙하였고, 이미 도장까지 찍어 독립운동에 찬성한 일이 있기 때문에 도망한다는 것은 도리에 반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총독부에 자수한 것이다.[8]
삼일운동 초기(3-4월)에 발생한 일을 보고한 선교사 자료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인 길선주는 늦게 서울에 도착했으며 바로 감옥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감옥 안이 영광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말할 필요없이 그의 요청은 허락되었다.[9]
1919년 3월 6일 총독부 경무국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선언서 서명자 전부가 구류되었다. 그 중에 朴목사 金목사도 가담하였고, 可愛相한 吉(吉善宙를 지칭함)은 스스로 獄舍로 갔는데, 그는 나도 발표자의 1인이니 체포할 이유가 있으면 체포하라고 말하고 체포를 당했다.[10]
1937년 회고록을 쓴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삼일운동을 서술하면서 3월 1일 서울역에 늦게 도착한 길선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친구들이 재빨리 다가가 서명자들이 모두 체포되었으니 도망가라고 말했으나, 길 목사는 다른 서명자들이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곳이라며 곧 바로 경찰서로 걸어갔다.
Why not? If Roman gladiators dared to come forth and fight to certain death for the praise of a Roman mob, why should not these men, for the sake of their country’s liberties, stand up before the seemingly averted face of God and cry Moritur te salutamus? So long as there are hearts that beat with love of liberty and hatred of slavery so long will this man’s act remain a symbol of patriotism.
왜 그러지 않아야 하나? 로마 검투사들이 로마 군중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감히 앞으로 나서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면, 왜 이 서명자들이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얼굴을 돌리신 듯한 하나님 앞에 들고 일어나 “목숨을 바칠 자들이 폐하께 인사드리옵나이다”라고 외치지 말아야하는가? 자유에 대한 사랑과 노예에 대한 증오로 박동치는 심장이 있는 한 이 남자의 행동은 애국심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11]
길선주의 행동은 초대교회 로마황제 앞에서 죽어간 검투사들의 용기에 버금가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자유를 사랑하는 애국심의 상징적 행동이었다.
사실 해방 후 첫 삼일절인 1949년 3월 1일 천도교 지도자로 33인 중의 한 명이었던 오세창은 2월 28일 29인이 모여 이틑날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발회식에 길선주 등 4인은 지방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으나, “나중에는 우리와 같이 고생을 하였다”라고 회고했다.[12]
감옥 생활과 재판
길선주는 독립 청원 서명 한 번으로 1년 8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서명,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길선주는 미국 선교사들의 사주 부분에 대해 엄중 취조를 당했다.
이번의 소위 독립운동사건이 재외 배일 조선인과의 연락관계 유무에 대해서는 주모자들을 엄중히 취조했으나 旣報(3월 22일 高第7964號)까지는 어떤 판명도 할 수 없었다. 그 후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耶蘇敎측 수령인 李昇薰, 梁甸伯, 吉善宙, 安世恒 등을 취조하고 또 중국 上海에서 조선 내로 잠입한 張德秀라는 자를 체포 취조했다.[13]
독립운동으로 장기 복역한 자들은 대개 종교인이었으므로, 이들은 감옥에서 성경이나 경전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지냈기에 다른 죄수들보다 잘 견딜 수 있었다. 길선주는 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보냈는데, 특히 요한계시록을 800독 하면서 고난의 시기를 잘 인내할 수 있었다. 석방 후 그의 말세론은 1970년대 이후 타세적이고 교회성장만 추구한 부흥사들의 종말론과는 격이 달랐다.
1919년 10월 고등법원에서 심리 중이었던 길선주에 대해서 평안남도 지사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의 장남 吉鎭亨은 윤치호의 寺內總督 암살사건에 연좌되었으며 차남 吉鎭京은 평양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구금 중이다. 부자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으므로 일반 교도가 숭배하는 바이며, 교도들은 1,200엔을 갹출하여 가옥을 신축하고 그 가족을 거주하게 할 계획이다.[14]
즉 평양 교인들은 길선주와 그 가족이 민족을 위해 겪는 고난을 조금은 덜어주기 위해 새 집을 마련하고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길선주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일은 어렵지 않았으니, “국민이 된 이상은 독립하고 싶지 않은 국민이 어디있소”라고 말했다.[15] 길선주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미결수로 20개월 간 감옥 생활을 했다. 재판 결과 경성 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언도받았다. 자신은 독립선언이 아니라 독립청원으로 알고 명의를 빌려주었다고 일관되게 말했기 때문이다. 길선주 외에도 비슷한 이유로 여러 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동경에 가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임규, 안세환 등이 무죄 판결을 받은 것과도 형평성이 맞았다. 그러나 복심법원 판결이 난 것은 1920년 10월 말이었기 때문에 이미 1년 8개월 정도 복역한 뒤였다. (참고로 길선주는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포상이 안 되다가 2009년에 이르러 독립장으로 포상을 받았다. 33인의 다른 분들은 대한민국장이나 대통령장을 받았다.)
석방 이후의 길선주 목사
당시 총독부는 주동자를 내란죄로 하면 대외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시위 위반으로 몰고 길선주 등은 청원 죄목으로 하여 무죄 방면했다. 그러나 이미 20개월 감옥 생활로 충분히 처벌한 셈이었다. 1920년 10월 석방 후 길선주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는 박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는 1922년 삼일절 때 길선주 목사를 소개하면서, 장남 진형이 백오인사건으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하고 방면되어 미국 유학을 했으나 신병으로 귀국 직후 사망한 일과, 둘째 아들 진경도 삼일독립운동으로 6개월간 징역을 살았던 것을 언급했다.[16]국내 인사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던 캘리포니아 한인들도 길 목사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4년 천도교의 『개벽』 잡지 기자들이 평양 교회를 방문했을 때, 길선주 목사에 대해서는 “己未에 길선주 목사가 독립선언서 사건으로 피착되고”라고 하여 긍정적으로 보았다.[17]
1933년 4월 장대현교회에서 다시 신구파 분쟁이 일어나 길선주 목사와 변인서 목사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1935년 11월 26일 길선주 목사가 향년 67세로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사경회 도중 뇌일혈로 쓰러져 별세했을 때,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 언론은 길 목사가 삼일운동 33인의 한 명이었음을 부각시켰다.[18] 12월 3일 숭실대학 강당에서 4,000명이 참여한 가운데 평양노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 대해서도 크게 보도했다.
해방 후 삼일절 행사에서 길선주 목사를 기림
1946년 3월 1일부터 삼일절 기념식이 이어졌다. 1949년 3월 1일 독립(건국) 후 첫 삼일절 기념식에서는 피로 물든 그 날을 기억하고 삼일정신으로 복귀하여 남북이 자주 통일하여 완전 독립된 나라를 이루자고 부르짖었다. 길선주는 33인의 한 명으로 기렸다. 33인 중 변절하여 반민족자로 생존해 있던 최린과 박희도는 비판했다. 파고다공원에서는 작고한 22인의 추도식이 열렸다. 오세창은 길선주 등 4인이 태화관 발회식에는 불참했으나 감옥에서 함께 고생했다고 회고했다.[19] 언론은 고생하는 유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20] 1950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는 33인유족동지회가 세운 길선주를 포함한 작고한 22인의 선열 기념탑의 개막식이 있었다.
오늘의 교훈
길선주의 기독교는 부흥과 사경회와 민족운동이 함께 가는 통합형이었다. 1920년대 길선주의 사경회는 일제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래서 1928년 봄 안동 사경회 때 임박한 전쟁을 말했기 때문에 유언비어 배포라는 경찰법 위반으로 29일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의 말세론은 일본 제국에 대한 도전적 예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사경회는 오전 성경 공부, 오후 특강, 저녁 부흥 집회로 일주일간 진행되었는데, 오후 특강 시간에는 청년과 부인들을 위한 성교육을 실시해 행복한 부부생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다. 말세론으로 일제 핍박을 이길 수 있는 내세 소망을 불어 넣어주고, 특강을 통해 현세 가정생활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는 통합적 신앙이었다.
아래 [사진 1]은 1909년 가족사진. 뒤에 장남이 서 있다. [사진 2]는 장남 길진형이 감옥에 간 후 가족 모습이다. 저런 집이 바로 장대현교회 목사의 집이었다.
큰아들 잃고, 남편은 서울 형무소에 있고, 둘째 아들도 잡혀서 평양 감옥에서 고생할 때, 길선주의 아내는 얼마나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을까? 그 모습을 보던 장대현교회 교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작은 새 집을 마련해 주어 위로했다.
오늘날 목사들은 어디가 영광의 자리인지 살펴야 한다. 세습이 아니라, 아들을 잃고, 아들을 감옥에 보낼 각오를 하고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만세를 부를 일이다. 길 목사의 근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겠지만, 민족을 위해 한 달이라도 감옥살이 한 후에, 혹은 작은 희생이라도 한 후에 길 목사를 비판할 일이다. 70년대 이후 물질주의에 빠진 부흥사들의 이미지를 길선주에게 덮어씌우는 현재주의는 삼가야 한다. 명품에 눈이 먼 유명 목사와 선교사의 사모들도 길선주 목사의 부인의 삶을 보면서 정신을 차릴 때이다. 삼일운동 100주년이 멀리 있지 않다. 나와 내 가족이 민족을 위해 조금이라도 희생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내 씀씀이와 일상이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웃음과 행복을 주는지 생각할 때이다.
[1] 이일구, 『己未를 알자』(무림사, 1979), 45~46.
[2] “현대의 예언자, 원로목사 길선주,” 『중외일보』, 1928년 6월 5일.
[3] 조문기, 『슬픈 조국의 노래』(민족문제연구소, 2005), 305.
[4] 옥성득,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기독교사상』 (2018년 9월), 9-18.
[5] 총독부 경무국 고제5410호 “독립 운동에 관한 건(제2보)”, 대정 8년(1919) 3월 1일.
[6]『每日申報』, 1919년 3월 7일자.
[7] 市川正明 편, 『3.1獨立運動』 1권(原書房, 1984), 91.
[8] 市川正明 편, 위의 책, 168.
[9] Korea Outbreak for Independence, “Part 1. Beginning of the Uprising”, 19.
[10] “獨立運動에 관한 건(제7보)”, 高第5971號.
[11] Homer B, Hulbert, “Echoes of the Orient”, typescript, Columbia University Library, 1937, 227.
[12] “감개무량하다: 오세창 옹 회고록”, 『연합신문』, 1949년 3월 1일.
[13] “騷擾事件과 在外 排日鮮人과의 關係”, 高第10719號, 1919년 4월 11일.
[14] “地方民情彙報, 騷擾犯人恚 대한 耶蘇敎徒의 동정”, 密 第102號 其484/高警 第28470號, 1919년 10월 6일.
[15] “獨立宣言書에 署名捺印은 非難事”, 『매일신보』, 1920년 7월 16일.
[16] “예수교 장로회 목사 길선주”, 『신한민보』, 1922년 3월 2일.
[17] 金起田·車相瓚, “朝鮮文化基本調査(其八)-平南道號”, 『개벽』, 1924년 9월.
[18] “己未 三十三인의 一人 吉善宙 牧師 永眠”, 『조선중앙일보』, 1935년 11월 28일.
[19] “삼일정신 계승하여 남북통일 완수하자”, 『연합신문』, 1949년 3월 1일.
[20] “삼일운동의 거성: 유가족 탐문기”, 『연합신문』, 1949년 3월 3일.
<좋은나무>를 후원해주세요.
관련 글 보기
┗1879년 1월 한국 개신교인 첫 세례-올해는 140주년(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