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집』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장편소설이다. (중략) 이 소설은 성장소설, 연애소설, 가정소설이자 법정소설, 추리소설, 사회고발소설의 면모를 다 가지고 있다. ‘황폐한 집’은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에스더가 사는 저택의 이름이다. 그리고 에스더의 후견인 존 잔다이스가 황폐한 집의 주인이다. (중략)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주제만 살펴볼까 한다. 첫째,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재판’이다. 둘째는 ‘정체성’의 문제다. ‘무엇이 나를 나로 규정하는가’하는 문제다. 셋째,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근거는 무엇인가’하는 문제다.(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황폐한 집』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작중 화자인 고아 소녀 에스더의 수기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장이 교차하며 나오다가 하나로 합쳐지는 흥미로운 구조로 짜여 있다. 소설의 주요 무대인 ‘황폐한 집’(Bleak House)은 에스더의 후견인 존 잔다이스가 사는 저택의 이름이다. 에스더가 이곳에서 여러 만남과 경험을 거치며 성숙해지고 마침내 참 사랑을 이루는 것이 이야기의 큰 뼈대다. 소설의 또 다른 주요 무대인 레스터 데들록 경의 저택 체스니 월드와 그곳 여주인의 사연이 에스더의 이야기와 합쳐지면서 소설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잔다이스 가문을 40년째 괴롭혀 온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재판의 어두운 역사가 작품의 배경으로 자리하면서 여러 등장인물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존 잔다이스의 또 다른 피후견인인 리처드가 그 재판에 휘말려 무너져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또 다른 큰 흐름을 이룬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소설을 두고 장르를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 연애소설, 가정소설이자 법정소설, 추리소설, 사회고발소설의 면모를 다 가지고 있다. 이 정도 소설을 가지고는 무슨 이야기인들 못 하랴 싶지만,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주제만 살펴볼까 한다. 첫째,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재판’이다. 둘째는 ‘무엇이 나를 나로 규정하는가’하는 ‘정체성’의 문제다. 셋째,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기반 문제다. 먼저 재판부터 살펴보자.

 

찰스 디킨스의 저작 『황폐한 집(BLEAK HOUSE)』(좌)과 그 한국어 번역본(우).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재판

으스스한 이름과 달리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는 황폐한 집은 유쾌한 곳이다. 주인공 에스더와 잔다이스 가문의 고아 리처드, 역시 고아인 사촌 에이더가 후견인 존 잔다이스와 만나서 함께 지내는 초반부의 황폐한 집은 너그러운 후견인과 그의 도움을 받은 싱그러운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즐거운 집이다.

그러나 거대한 불행의 기운이 잔다이스 가문에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40년이나 이어진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재판’이 원흉이다. 재판의 실체는 진작 오리무중이 되어버렸고 절차는 계속 진행되지만 정작 아무것도 되는 일은 없는 소송으로 득을 보는 것은 법원과 변호사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먹고사는 이들뿐이다. 잔다이스 가문 사람들 중에는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재판에서 깔끔하게 벗어나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다가 무너진 사람도 있고, 재판이 어떻게든 정리가 되면 상당한 액수의 유산이 자기에게 떨어질지 모른다는 기약 없는 기대에 목매다가 인생을 고스란히 허비해버린 이들도 있다.

 

소설 『황폐한 집』을 원작으로 한 BBC 드라마 <황폐한 집>에서 존 잔다이스로 분한 데니스 로슨. (출처: BBC 홈페이지 갈무리)

 

존 잔다이스의 피후견인 중 한 사람인 리처드는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고 준비하는 힘든 과정을 진득하게 해낼 줄 모른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막막한 젊은 날에는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부딪쳐가며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진 것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진 자원과 재능을 활용해 미래를 준비하는 수밖에 없기에 힘들어도, 하기 싫어도 이를 악물고 자신을 채찍질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리처드에게는 기댈 구석이 있었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소송이 잘 진행될 경우 펼쳐질 장밋빛 그림이 그의 마음에서 조금씩 큰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이 소송만 어떻게 잘 되면 평생 먹고살 유산이 떨어질 것 같은데, 그러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도 그녀와 아름다운 인생을 꾸려갈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들이 조금씩 그를 사로잡는다.

후견인 존 잔다이스가 거듭해서 애정 어린 경고를 보내지만, 그것은 두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아저씨의 조언에 따르자면 힘든 현실을 직시하고 노력을 해야 하니까. 이윽고 리처드는 잔다이스 가문 사람들을 재판에 끌어들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악덕 변호사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는데. 과연 그는 숱한 친척들이 걸어간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같은 잔다이스 가문의 어른인 존 잔다이스는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을 꿋꿋이 걸어간다. 존 잔다이스는 재판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고 황폐한 집을 지키며, 자신이 돌볼 수 있는 젊은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후견인 역할을 멋지게 감당하며 살아간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자살로 생을 마감한 큰아버지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의 파멸에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재판을 피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너무나 멋있고 훌륭한 사람, 존경할 만한 어른으로 살아간다. 그가 소송의 트라우마로 인해 위축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냉혈한으로 머물지 않고 더없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사실 존 잔다이스의 과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존 잔다이스가 마음을 둔 여인에게 하는 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사람됨을 보건대 그 말이 허튼소리일 것 같지는 않다) 그를 바꿔놓은 것은 사랑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겨울날 역마차 안에서 만난 뒤로 너는 나의 사람됨을 바꾸어주었다. 그때부터 줄곧 내게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해주었어.”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남녀 간의 사랑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라고 되뇌던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겠다고 이를 악무는 여러 아버지들의 사연에서 비슷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위력. 이것은 주인공 에스더를 비롯하여 『황폐한 집』의 여러 등장인물들에게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의 힘을 말하고 끝낼 수가 없다. 리처드에게도 사랑하는 이가 있었고, 그의 사랑도 진실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존 잔다이스의 경우와 달리, 사랑은 리처드를 변화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현실 회피적 성향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어쩌면, 엄청난 한방을 기대하게 만드는 재판도,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놓는 사랑도, 그 사람을 바꿔 놓는다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처음부터 있던 무엇인가를 건드리고 촉발하고 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는 『황폐한 집』의 진짜 주인공, 에스더 이야기로 좀 더 진행하며 살펴보자.

 

정체성

무엇이 정체성의 핵심일까. 이름일까? 누군가와 맺는 관계일까? 직업일까? 그가 이룬 어떤 업적일까? 뒤집어서 말해보자. 무엇이 정체성을 바꿔놓을까? 무엇을 잃으면 더 이상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나로 규정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디킨스는 이 소설에서 그 문제를 끈질기게 탐구한다.

주인공 에스더는 의붓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자신이 어머니 얼굴에 먹칠을 한 존재이고 ‘어두운 그림자를 짊어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없음을 알게 된 어린 에스더는 놀랍게도 좌절하거나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근면, 만족, 친절을 익히고 남을 위해 살고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사랑받도록 노력하자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런 결심에 따라 ‘의무의 삶’을 살고, 그로 인해 가는 곳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 그녀는 의무를 다하는 삶의 화신과도 같다. 나중에 어느 등장인물이 한마디로 정의한 대로, 그녀는 ‘온순하면서도 용감한’ 사람이 된다.

에스더는 고아라는 사실로도, 아무도 사랑해주는 이가 없을 때도,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미덕(근면, 만족, 친절)을 갖추고 이타적으로 살기로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로,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로 결정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녀는 이후에도 줄곧 그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질 때, 그로 인해 자신이 누구도 원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밀려올 때도 그 생각에 지지 않는다.

그런데 에스더의 정체성이 가장 크게 위협받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름다운 젊은 처녀 에스더가 열병에 걸린 하녀를 돌보다가 열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다행히 목숨은 건지지만 그녀는 열병의 후유증으로 아름다움을 잃고 얼굴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얼굴이 달라지기 전에 방문했던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 마을의 어느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저 아가씨는 옛날처럼 아름답지 않아요?”

어떤 이들은 얼굴이 달라진 그녀를 전과 다르게 대한다. 청혼 사실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변해버린 얼굴도 그에게는 전혀 변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부분에서 에스더는 대놓고 이렇게 고백한다. “옛날 그대로의 얼굴이었다고 해도 지금 이상으로 사랑을 받지는 못했으리라.” 아름다운 얼굴은 참으로 에스더를 구성하는 일부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에스더는 아쉬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도,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동일하게 반응한다. 아름다움을 잃고 연모했던 사람과의 인연을 기대할 수 없다고 믿게 된 순간에도,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도를 되새기고 이렇게 다짐한다. ‘나는 의무의 길을 얌전히 걸으면 되고, … 그 길의 끝에서 그분이 나에 대해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던 그 시절의 내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정혼한 상태에서 진정한 사랑,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벅찬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같은 결심을 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씨. 자기 몸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 당신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었는지 사람들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라는 그 사람의 칭찬에 그녀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더욱 굳게 결심한다.

흥미롭게도, 에스더는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았을 때나 한결같이 같은 결심을 한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그녀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친절하고 사랑받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 같다. 상황이 어떻든 어김없이 그런 결론으로 나가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이 선한 지향의 근원은 무엇일까.

악의 근원 못지않게 선의 근원도 신비다. 끊임없이 선을 추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선의로 남을 대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넘어 경이감을 안겨준다. 거기서 초자연적이고 신적 근원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선의 근원에 대해서는 신비와 ‘은혜’를 말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것이 유지되는 조건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에스더의 선한 지향이 잘 다독여지고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존 잔다이스라는 훌륭한 후견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후견인의 전폭적인 지지와 격려, 사랑이 있었기에 그녀의 선한 의지와 성품이 꺾이지 않고, 이용당하지 않고, 더욱더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었다는 것. 그녀가 온전히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면,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세상에서 끝없이 시달려야 했던 거리의 아이 조와 같았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여기서 『황폐한 집』의 또 다른 주요 인물을 통해 ‘내가 누리는 것의 기반’ 문제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황폐한 집』을 원작으로 한 BBC 드라마 <황폐한 집>에서 에스더로 분한 안나 맥스웰 마틴. (출처: BBC 홈페이지 갈무리)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의 기반

『황폐한 집』의 양대 무대는 바로 황폐한 집과 레스터 데들록 경의 저택인 체스니 월드다. 그리고 체스니 월드의 안주인 데들록 부인은 사교계의 정점에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도도한 미의 화신, 유행을 선도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비밀이 있었다. 그녀는 초인적인 의지와 연기력으로 비밀을 숨기고 자신의 위치를 아슬아슬하게 지켜 나간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의 비밀을 파악한 사람이 등장하고, 그녀의 비밀을 쥐고 그녀를 압박하던 그 사람이 갑자기 살해당한다. 얼마 후 데들록 부인은 자신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는 사실과 자신의 숨겨온 과거가 곧 드러나게 생겼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숨겨온 과거로 그녀를 압박하다 이제 죽어서는 억울한 누명까지 안겨준 이 추적자에게서 벗어나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결백하나, 그 외의 모든 죄과에 대해서는 인정한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간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나에게는 이제 집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당신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으로부터 과분한 애정을 받으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자에 대해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부디 저를 잊어주십시오. 당신을 떠나는 것은 이제부터 벗어나려 하는 치욕보다도 더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입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데들록 경은 아내가 사라졌음을 알고, 불편해진 몸으로 이렇게 아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쓰려고 한다. “모든 것을 용서할 테니 부디….” 그리고 차마 다 쓰지 못한 데들록 경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데들록 부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버킷 경감의 추적이 시작된다. 모습을 감추어버린 데들록 부인에게 그 소식이 제때 전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녀는 남편의 관대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외통수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로 인해 억울하게 벌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경찰관이 있었다. 버킷 경감은 치밀한 조사 끝에 이미 진범을 밝혀냈던 것이다. 그녀가 생각한 억울한 누명과 그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는 그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것이었다. 버킷 경감이 전할 소식에는 진범이 잡혔다는 기쁜 소식도 들어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서 이전의 그녀를 규정하던 오만, 도도함은 찾아볼 수 없다. “폐를 끼치는”, “과분한 애정”, “깊은 부끄러움”, 같은 표현만 가득하다. 급기야 그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자신이 남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화를 내는 것”뿐이라고 밝힌다.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문제를 ‘그녀가 누리던 것의 기반’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가 자신의 연기 위에, 철저한 자기 관리와 비밀 유지 위에 서 있은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이 무너질 때,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도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데들록 부인은 자신과 남편의 관계를 오해했다. 남편의 명예와 지위에 걸맞게 자신을 포장하고 유지하는 것이 관계의 기반이요,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과 그에 충실한 자기 관리가 최소한의 염치요 부끄러움을 아는 일이라고 여겼다. 어쩌면 그녀의 결혼과 인생 전체가 그런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늘 도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늘 의식했으며, 자신의 실체를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지 능히 상상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의 선망과 존경도 다 모래로 쌓은 성처럼 덧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친척조차 없었던 그녀가 데들록 부인의 지위에 오른 것은 순전히 남편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인범 혐의를 벗을 수 없으리라 믿었던 것처럼, 남편과의 관계도 자신이 과거를 성공적으로 숨김으로써 가문의 명예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속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너무나 단단하게 자리 잡은 이런 두 가지 믿음이 곧 그녀의 현실을 규정해버렸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가운데 버킷 경감은 이미 진범을 밝혀냈고, 남편은 가문의 명예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아내에 비하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아내를 사랑했다. 그는 남아있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나와 아내 사이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고, 나는 아내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으며, 내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내를 몹시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나의 이 같은 뜻을 아내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으면 해.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비슷한 메시지를 다시금 반복한다.

나는 아내에게 베푼 호의를 거둬들일 생각이 없으며, 나와 아내와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내가 이제까지 아내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한 그 어떤 일도 취소할 생각이 없다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어떤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 그동안 자신의 지위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사랑이 더 근본적이었고, 아내의 과거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안전하게 돌아오기만 바라는 메시지에 반응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과연 그녀는 그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

디킨스는 자신의 의지와 연기로, 극도의 노력으로 간신히 버틴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의 연기와 속임수가 당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랑이 우리 존재의 근거라고. 그 사랑에 합당하게 반응할 수 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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