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소식은 부활 절기 내내, 오직 부활 예수의 생명과 능력으로 살아감을 고백하는 성도의 일상 속에서, 마르지 않는 샘처럼 날마다 선포되어야 한다. 할렐루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할렐루야의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며, 할렐루야로 서로 인사하고 교제하며, 할렐루야의 부활 메시지로 새 힘을 얻는 시기가 바로 부활 절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 절기에 교회에는 흰색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옛 자아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거듭난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세례(baptism)는 초대교회 이래 부활 전야(Easter Vigil)에 이루어지는 절정의 예식이 되었다.(본문 중)

오석진(감리교신학대학교 객원교수, 예배학)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더 좋아, 아빠가 더 좋아?”라는 질문처럼, 교회에서 종종 “성탄절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부활절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듣게 된다. 물론 둘 다 중요하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의 근본정신 및 역사,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볼 때,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 사건이며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심으로써 진리와 생명의 길을 내셨을 뿐 아니라, 그 길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은 모든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께서 일찍이 공생애 시절에 말씀하셨던 가르침(마 16:24)에서도, 그 가르침을 몸과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갈 2:20)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가르침 위에서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1차 증인들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곧 ‘나의 부활’로 고백할 수 있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날마다 모이기에 힘썼던 모임이 오늘날 ‘예배’의 원형이 되었고, 그렇게 모인 부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영화 <선 오브 갓> 스틸컷.

 

이처럼 예배와 교회의 시작이 부활에 근거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자체가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부활의 날인 ‘주일’(Lord’s day)이 기존의 안식일을 대체하면서 그리스도교 실천의 중심인 주일 성수의 전통도 정립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주일 예배는 매 주일을 ‘작은 부활절’(Little Easter)로 기념하면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영광을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부활이 중요했던 만큼 부활절을 거룩하게 준비하여 맞고자 하는 노력도 생겨났다. 부활절 전 40일(주일은 제외)을 ‘사순절’(Lent)로 지키기 시작하면서 부활절의 중요성은 더욱 보편적으로 인식되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제일 먼저 보름달이 뜨는 날 후에 오는 첫 번째 주일이다. 그리고 이 날을 기준으로 그해의 모든 교회력 절기가 정해진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한 해 삶의 기준점이 된다. 교회력의 모든 절기들은 각각의 점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진 시간의 흐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잔치는 부활 주일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교회는 부활 주일부터,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날(승천절)을 지나, 성령을 보내시어 몸 된 교회를 탄생시키신 ‘성령강림절’(Pentecost 또는 Whit Sunday)까지 50일의 기간을 ‘부활 절기’(Eastertide)로 지키며 살아간다. 이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 머무셨던 기간과 최초의 성령 강림을 기념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부활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기 위해, 주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고백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교회는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오늘날까지 그런 정신의 맥이 전해진 대표적인 예가 사순절 기간의 ‘금식’(fasting)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을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다. 주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40일을 머무신 것처럼, 성도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만족과 유익만을 쫓던 삶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철저히 포기함으로써 온전히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를 의존하는 경건의 훈련을 한다.

사순절의 40일 기간에는 주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주일은 철저히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식과 절제의 경건 훈련을 실행하면서 부활을 향해 가고 있는 성도들이 중간에 맞이한 주일에 갑자기 아직 도달하지도 않은 부활을 경축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는 예배 예식 가운데 몇 가지가 사라진다. 대표적인 것이 ‘할렐루야’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찬양하며 부활의 영광을 한껏 높이기 위해 이 인사를 꾹 참아두었다가 부활 새벽에 비로소 터뜨릴 때의 감격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그것이 부재할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처럼, 평상시에 교회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던 이 한마디를 부활의 큰 즐거움 속에서 외침으로써, 긴 기다림의 끝에서 맛보게 되는 열매의 달콤함을 경험한다.

이 감격과 환희를 어찌 부활 주일 단 하루에만 국한할 수 있으랴! 부활의 소식은 부활 절기 내내, 오직 부활 예수의 생명과 능력으로 살아감을 고백하는 성도의 일상 속에서, 마르지 않는 샘처럼 날마다 선포되어야 한다. 할렐루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하며, 할렐루야의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며, 할렐루야로 서로 인사하고 교제하며, 할렐루야의 부활 메시지로 새 힘을 얻는 시기가 바로 부활 절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 절기에 교회에는 흰색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룩하고 순결한 하얀색으로 공동체 전체를 덮었다. 때때로 부활하여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을 상징하는 금색을 더하기도 했다. 옛 자아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거듭난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세례(baptism)는 초대교회 이래 부활 전야(Easter Vigil)에 이루어지는 절정의 예식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원작을 헨드릭 반 브로엑이 1572년에 다시 그린 것.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에 있다.

 

오늘날 부활절과 함께 익숙해진 것으로 부활절 토끼와 삶은 달걀이 있다. 이런 것들은 성서적 배경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주변 문화로부터 근거도 불분명하게 유래한 것들이라 상업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들도 많다. 이런 문화적 요소들의 경우는 부활의 정신에 입각한 재해석과 의미 부여를 통해 신앙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으로 재창조 할 수 있는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교회에서 ‘부활절 달걀’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부활절이 교회 안의 축제를 넘어 세상을 위한 사건임을 알리는 복음 전파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어떤 문화적 요소들은 교회로 하여금 부활의 의미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도록 돕는 마중물이 될 수도 있다.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이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선포되고, 증거되며, 드러나고, 살아내져야 하는 거룩한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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