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날 인생을 걸고 배웠던 바둑의 관점과 통찰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에게 모든 이들의 삶은 자기만의 바둑이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은 둥글다!’며 인생을 축구에 비유하고,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생은 9회 말 투아웃부터!’라고 외친다. 『모비딕』의 저자 허먼 멜빌은 인생이 고래잡이 여행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래잡이 경력이 있는 멜빌에게 고래를 안다는 것, 고래잡이의 생활을 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비딕』의 화자 이슈마엘의 입을 빌어 “포경선은 나의 예일, 나의 하버드”라고 선언한다.(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표면에 머무르는 능력

『모든 것은 빛난다』(사월의책 역간)의 저자들(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이하 HS)에 따르면, 『모비딕』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모비딕을 신으로, 에이해브 선장을 밀턴의 사탄처럼 신에게 대항하는 존재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HS는 에히해브(아합) 선장의 이름을 필두로 그렇게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HS는 소설 속 고래가 우주와 세계의 궁극적인 비밀을 뜻하고, 고래를 잡으려는 광기에 사로잡힌 에이해브 선장은 비밀과 진리를 움켜쥐려는 사람이라고 본다. 모비딕을 추격하는 에이해브의 모습에서 HS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미친 듯이 추구하는 모습”을 연상한다. 에이해브는 우주가 불가사의하다는 생각, 궁극적으로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철저히 증오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최종적이며 보편적인 진리, 즉 사물들의 존재 방식에 관한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고수한다. 그것은 뭔가 전통적 신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HS에 따르면 『모비딕』은 이런 잘못된 일신론적 정념이야말로 더없이 위험스럽고 치명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책이다.

HS는 『모비딕』에서 방대하게 등장하는 고래에 대한 정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 이 정보는 분명하지 않고 끊임없이 늘어난다. 고래의 모습도 얼굴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계속해서 변하고 파악할 수 없는 존재다. HS에 따르면 모비딕의 공격으로 피쿼드 호가 가라앉는 장면이 “서양 역사를 규정해온 초월적 진리에 대한 에이해브의 철저한 투신이 바로 서양사를 내부로부터 침몰시킨 원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하나에 미쳐 있는 에이해브의 일신주의를 통해서 이 우주가 가장 혐오하는 방식의 유화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멜빌의 책이 지닌 ‘사악함’이라고 주장한다.

이슈메일은 이런 에이해브와 대척점에 놓인 존재이다. 그는 상황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 단일한 진리에 메이지 않고 그때그때 자신을 변모시키는 사람이다. 장로교 목사의 설교를 감명 깊게 듣고는 이교도 작살꾼의 우상숭배에 연이어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멜빌의 우주에는 신이 없고, 따라서 우주 자체에 숨겨진 진리도 없”기 때문이다. 고래에 대한 멜빌의 이해 속에는 “표면적인 사건들 배후에 감춰진 우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표면적인 사건들 자체가 의미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이슈메일의 놀라운 점은 “이런 표면적 의미만을 가지고도 잘 살아가고, 거기서 즐거움과 안식의 참된 처소를 발견한다는 데 있다.” HS가 주장하는 일신론에 대한 대안은 “이렇듯 표면에 머무르며 사는 능력, 즉 일상 속에 감춰진 목적을 찾는 대신 그것이 선사하는 의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 이미 주어져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1851년 출간된 소설 『모비딕』 초판.

 

작살꾼의 은유

책에서 본문이 시작되기 전, 아니 목차도 나오기 전에 등장하는 제사(題詞)는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보통 거기에 작가는 자기 책의 핵심 이미지를 담아내는 글을 고르고 골라서 싣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성신학자이자 현대 미국어 성경 『메시지』의 번역자로 유명한, 그러나 무엇보다 스스로를 목사로 이해했던 유진 피터슨의 회고록 제사에 『모비딕』의 다음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이 세계의 작살꾼들이 작살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식은, 애를 쓰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작살을 던지는 것이다.

그는 『모비딕』의 핵심 구조를 이렇게 이해한다. “악의 상징인 하얀 고래와 상처 입은 정의를 의인화한 절름발이 선장이 전투를 치른다. 역사는 영적 전투가 펼쳐지는 소설이고, 교회는 포경선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소음이 가득하고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든다. 그런데 포경선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한 사람이 있다. 노를 잡지도, 땀을 흘리지도, 그렇다고 고함을 치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작살을 꽂을 사람이다. 작살꾼이 바로 유진 피터슨이 생각하는 목사의 이미지다.

그의 상상 속에서 멜빌의 소설에 나오는 작살꾼은 “소금, 누룩, 씨앗처럼 작고 미미해 보이는 것이 결국 큰 것을 이루어낸다는 예수님의 비유와 하나가 되었다.” 현대의 서구문화는 그와는 반대로 크고, 많고, 시끄러운 것을 선전한다. 그렇다면 다들 열광적으로 노를 향해 뛰어가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말없이 침착하게 앉아 있는 작살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진 피터슨은 그렇게 묻고 자신은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

 

두 가지 독법

내가 철학적, 문학비평적으로 『모비딕』 같은 대작을 분석하고 평가할 역량은 안 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유진 피터슨의 회고록에서 두 쪽 분량으로 실은 소감과 『모든 것은 빛난다』의 100쪽이 훌쩍 넘는 『모비딕』 해석을 동급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멜빌이 내서니얼 호손에게 쓴 편지를 인용하며 그 책이 일신론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다신론을 옹호하는 ‘사악한 책’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HS의 설명은 대단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HS가 멜빌의 의도와 책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고 피터슨이 그 책의 일부 이미지를 멋대로 가져다 쓴 것이라 해도,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싶다. 유진 피터슨은 목사가 작살꾼이라는 비유가 완벽한 은유는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 “완벽한 비유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작살꾼 은유는 모비딕과 아합 선장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것 같은 여행에서 하나님과 우리 회중 앞에 내가 집중하며 가만히 있을 수 있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진 피터슨은 이미 다른 곳에서도 이런 ‘약탈’을 감행한 바 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기독교와 그 도덕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했던 니체의 글에 등장하는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는 표현을 가져와 그리스도인의 순례길을 규정하는 문구로 사용했다. 유진의 책 『한 길 가는 순례자』의 영어 원제가 바로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다. 맥락을 몰라서가 아니라, 출처를 잘못 파악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방향과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발견하는 설렘과 짜릿함 같은 것을 그는 알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즐거움이라면 나도 가끔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부류의 약탈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잡은 고래와 놓친 고래

『모비딕』을 읽어 나가면 작가가 독자의 관심이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기로 작심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유명한 고래 이야기, 고래에 얽힌 사연, 고래의 멸종 여부에 대한 예측, 고래잡이배에서 벌어지는 온갖 작업(고래는 어떻게 잡고, 어떻게 배에 붙들어 매고, 어떻게 해체하며 기름을 빼내고 보관하는가 등)에 대한 대목들도 꽤 흥미진진하다. 마치 피쿼드 호에 같이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고 같이 경험하는 느낌이랄까. 저자는 이런 몰입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날 인생을 걸고 배웠던 바둑의 관점과 통찰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에게 모든 이들의 삶은 자기만의 바둑이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은 둥글다!’며 인생을 축구에 비유하고,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생은 9회 말 투아웃부터!’라고 외친다.

『모비딕』의 저자 허먼 멜빌은 인생이 고래잡이 여행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래잡이 경력이 있는 멜빌에게 고래를 안다는 것, 고래잡이의 생활을 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비딕』의 화자 이슈마엘의 입을 빌어 “포경선은 나의 예일, 나의 하버드”라고 선언한다.

그의 당당한 선언이 과연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들려준 고래 이야기를 다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나만 살펴보면 충분할 것이다. 89장에 나오는 ‘잡은 고래와 놓친 고래’를 보자. 1850년대에 고래잡이는 정말 위험한 직업이었다. 󰡔모비딕󰡕에는 그 위험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사람들이 그런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커다란 보상 덕분이었다. 모든 것은 고래를 얼마나 잡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배의 작살을 맞고 달아난 고래가 다른 배에 잡히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럴 때 고래잡이들 사이에서 고래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없이 중요했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간단한 두 원칙을 소개한다.

 

  1.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이다.
  2. 놓친 고래는 먼저 잡는 자가 임자다.

 

잡힌 고래란? “살았건 죽었건 사람이 탄 배나 보트, 또는 한 사람 이상의 점유자가 조종하는 여하한 장치에 연결되어 있으면” 잡힌 고래다. 그런데 잡힌 고래, 놓친 고래 이야기를 한창 늘어놓던 멜빌은 은근슬쩍 그것을 은유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고래사냥이 펼쳐지는 바다는 어느새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상대로 제멋대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인간 세상이 된다. 저자가 늘어놓는 ‘잡힌 고래’의 사례를 들어보시라. 러시아 농노, 공화국 노예,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과부의 마지막 한 푼, 고리대금업자의 선불이나 공작이 물려받은 마을과 촌락.

그럼 놓친 고래는 인간 세상에서 무엇일까? 영국에게 인도가, 미합중국에게 멕시코가 놓친 고래다. 바로 위에서 말한 ‘잡힌 고래’와 같은 선상에서 펼쳐지는 비유다. 그런데 곧이어 멜빌의 고래사냥 비유는 커다란 도약을 감행한다. 인간의 탐욕과 착취의 대상인 약자들로서의 고래, 약자들을 정복하고 강탈하는 강자들 간의 분쟁 해결의 원리에서 출발한 ‘잡힌 고래/놓친 고래’ 원리는 순식간에 ‘놓쳐서는 안 될, 그러나 엉뚱한 것을 좇다가 놓쳐버린 소중한 그 무엇’의 은유로 바뀐다. 이런 의미에서는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가 놓친 고래요, 모든 인간의 생각과 사상이 놓친 고래며, 신앙의 원칙이 놓친 고래다. 그리고 이 말을 적당히 옮기고 있는 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남의 말을 주워섬기는 사람에게 철학자의 생각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표면에 머물 수 없는 인간

여기서 슬그머니 떠오르는 생각 하나. 멜빌은 왜 고래 이야기의 표면에 머물 수 없었을까? 고래 이야기면 고래 이야기에 머물러야지 왜 거기서 인간 세계에 대한 성찰로 넘어간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문제 제기는 공연한 시비 걸기가 되기 십상이다. 표면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적용, 더 깊은 의미 추구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일, 아니 인간에게만 고유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선물을 받으면 선물 자체에 집중할 줄 아는 것, 좋은 모습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받았건 상관없이 자신이 받은 선물에 감사하고 그것을 누릴 줄 아는 것은 귀한 모습이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아닌 다음에야 선물을 받았으면 선물을 누가 줬는지 묻고, 그것을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 아닌가? 좋은 작품을 만나면 작품 자체에 푹 잠겨서 감상하고 즐기는 것이 물론 좋은 일이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묻게 되고 그 작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삶의 의미도, 내가 여기 존재하는 목적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질문이 엉뚱한 결과를 낳을 때도 있을 것이며 잘못된 대답이 유행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답이 나왔다고 해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결국 관건은 사실이 무엇이냐에 있는 것 같다. 선물을 준 사람이 없고 선물만 있는 것이라면, 선물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면, 선물을 준 사람에 대한 관심은 무의미할 것이고 선물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거리가 될 것이다. 작가가 없고 저절로 생겨난 작품에 대해서 작가에 관심을 갖는다면, 작품에 대한 관심을 흐려놓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선물을 준 이가 없을까. 작가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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