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최초 한글 번역본 『텬로력뎡』(1895)은 그처럼 자연스럽게, 원래 우리 민족의 일부였던 것처럼 살갑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삽화가 눈을 사로잡았다. 갓 쓰고 한복을 입은 주인공들의 복장과 둥글둥글하고 평면적인 우리네 얼굴들,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배경. 게다가 옛말이 주는 정겨움이 있었다. 300년도 전에 잉글랜드에서 파란 눈의 외국인 존 번연이 경험하고 걸었던 신앙의 길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을 통해, 125년 전 우리 선조들도 그 길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연대성이 범상치 않게 다가왔다.(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기독교 고전들이 대체로 ‘서양’ 책들이다 보니, 이 땅을 사는 우리의 문제를 다룬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다. 이질감, 이물감이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나오는 ‘야소’(예수)라는 이름, 침략군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에서 나부끼는 십자가 깃발과 그 교리를 기괴하게 여기는 이순신 장군의 반응은 그런 거부감의 극대치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김훈이 이후에 쓴 『흑산』은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당시의 지독한 사회 모순, 불평등, 암담한 민초들의 삶에 다가가는 천주교의 매력, 그것은 더 이상 외국 침략군이 끌고 온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주장과 이미지가 아니었다. ‘마노리’라는 마부, ‘아리’라는 도망 나온 여종, 그들에게 천주 교리는 처음 들었는데도 너무 자연스러워 새삼 가르칠 것도 없는 것, 원래 알고 있었던 것인 듯했다.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의 최초 한글 번역본 『텬로력뎡』(출간 연도가 무려 1895년!)은 그처럼 자연스럽게, 원래 우리 민족의 일부였던 것처럼 살갑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삽화가 눈을 사로잡았다. 갓 쓰고 한복을 입은 주인공들의 복장과 둥글둥글하고 평면적인 우리네 얼굴들(!),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배경. 게다가 옛말이 주는 정겨움이 있었다. 300년도 전에 잉글랜드에서 파란 눈의 외국인 존 번연이 경험하고 걸었던 신앙의 길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을 통해, 125년 전 우리 선조들도 그 길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 연대성이 범상치 않게 다가왔다.

 

<텬로력뎡>의 삽도. 고전적인 한국 묘사법이 돋보인다. (출처: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순례의 시작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이렇게 분노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세상에는 불의가 가득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슬픔도 많다. 그런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분노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처지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C. 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앞날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에 복음 전도자들은 심판의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복음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대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재판정 피고석에 앉아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더 이상 피고석에 앉아 있지 않다. 그들은 재판석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재판석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피고석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과 행하심이 정당한지 따진다.

그러나 천로역정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책 한 권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점점 무거워지는 짐 보따리의 무게에 눌리고 자신이 사는 도시가 망할 것을 깨닫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의 하소연을 듣고 그의 정신 상태를 걱정할 따름이다. 남들 다 속 편하게 사는데 어째서 혼자만 그렇게 불안에 떠는가. 피로해서 생긴 신경증,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잠을 재워보기도 하고, 그러다 말겠지 하고 아예 무시하기도 한다.

크리스천의 순례는 죄의 무게에 짓눌리고, 그가 읽은 책이 가르치는 다가올 심판의 엄중함을 깨닫고 두려움에 떠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병들어 아픈 자각 증상이 있는 사람이라야 병원을 찾는 것처럼, 지금 이대로 남들처럼 살아서는 소망이 없음을 깨닫는 자만이 순례의 길에 나선다. 그래서 순례의 길은 우아하게 시작되지 않는다.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관찰자가 아니며, 논평가의 자리에 있지 않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인식, 뼈저린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돌아서야 한다. 떠나야 한다.

 

주어진 빛을 따라가라

짐을 지고 멸망이 두려워 떠는 크리스천에게 전도자는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적힌 두루마리를 보여준다.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모르는 크리스천에게 전도자는 많은 것을 말하지 않고 이렇게 묻는다. ‘저 멀리 좁은 문이 보이는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저 멀리 환한 빛을 보고 따라가라’고 한다.

이것은 C. S. 루이스가 신앙적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거듭거듭 되풀이하는 말이기도 하다. 주어지는 빛만큼만 순종하면 된다. 그다음은 때가 되면 또 드러날 것이다. 당장의 느낌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이 받은 지침에 순종하라. 한 번에 많은 것이 주어져도 실은 감당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아이와 같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생각과 심정을 내 어찌 다 알까마는, 내 어린 시절의 경험을 회상해보면 당시 내가 느꼈던 두려움과 답답함, 아픔은 어른이 된 후 겪는 그것들에 못지않은 큰 무게로 다가왔었다. 시험을 못 봐서 부모님께 차마 성적표를 내밀 엄두가 안 나던 그 부담감, 큰 잘못을 저지른 순간 느꼈던 그 암담함, 숙제는 안 했는데 놀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버렸을 때 나를 짓누르던 인생의 무게, 친구의 놀림을 받고 느꼈던 괴로움, 운동회 때 100m 달리기를 하다가 신발이 벗겨졌을 때의 그 처참함…. ‘아무것도 아니네’라고 말해버리면 곤란하다. 그것은 단지 어른들이 졸업 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과거지사’임을 알기에 하는 소리일 뿐. 게다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어른들의 행동과 반응이 아이들의 그것보다 별로 어른스럽지 못한 경우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만만치 않은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즐겁다. 천진난만하다. 물론 철이 없어서 그렇다. 철이 든다는 것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현재 자신이 처한 자리를 파악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이가 철이 들어 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많은 양의 공부와 겪어야 할 세월의 무게들을 다 예상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아이에게 유익할까? 천만의 말씀. 아마 아이는 중압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소화불량, 식욕부진, 수면장애 등을 호소할 것이다. 아이는 그냥 철없이 열심히 놀면서 당장 떠오르는 호기심과 흥미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의 공부만 하면 족하다.

멀리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아이의 한계이자 힘이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건 부딪쳐 볼 수 있고, 조금 후의 상황이 주는 무게와 의미심장함을 가늠하지 못한 채 조금만 상황이 나아진다 싶으면 마냥 즐겁게 논다. 물론 자라지 않고 마냥 천진난만한 그 자리에만 머물고, 미래를 개척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끄는 자리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문제겠지만, 그런 걱정은 좀 미뤄 둬도 좋다.

 

같은 목적지, 다른 순례의 여정: 나의 거울 캐릭터는?

‘크리스천’과 ‘신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서 만난다. 같은 마을에서 같은 죄의식을 느끼고 멸망을 피해 같은 천성을 바라고 순례에 나섰다. 그러나 두 사람의 순례 길은 똑같지 않았다. 그들이 당하는 시험과 시련도 동일하지 않았다.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도 있었다.

크리스천은 ‘아볼루온’을 만나 목숨을 건 전투를 벌여야 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갖가지 위험을 헤치며 위태로운 길을 지나야 했다. 반면 신실은 ‘음탕’을 만나 큰 유혹을 당했고, ‘첫 사람 아담’을 만나 하마터면 따라가 노예가 될 뻔했다. 사람마다 다른 시험을 만나게 되어 있다.

‘허망 시장’(또는 허영의 시장)에서 사로잡힌 후 그들이 맞는 운명은 순례의 여정이 순례자마다 다름을 분명히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허망 시장의 허망한 것들에 한눈팔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망 시장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다. 신실은 결국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반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와 허망 시를 벗어난다. 일찍이 예수님은 요한이 어떻게 될지 묻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각 사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순례의 여정을 걷게 될 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로역정』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서 독자마다 마음에 다가오는 인물, 특히 명심해야 할 캐릭터가 다를 것이다. 모든 캐릭터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겠다. 첫째, 자신이 특히 경계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반면교사로 삼을 캐릭터라고 하겠다. 내 마음에 경고가 되는 캐릭터는 ‘허풍선’(Talkative, 수다쟁이)이다.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핵심은 실천이다. ‘말이 아니라 능력’이다(고전 4:20).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에 안주하지 말라. 남이 적어 놓은 주옥같은 말씀들과 깨달음들을 듣고 읽어 전달하는 자들이여, 조심할진저.

둘째, 순례의 길에 격려를 제공하는 캐릭터이다. ‘약한 믿음’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위태위태하고 강도들까지 만나 다 빼앗기는 듯했으나, 그래도 가장 귀중한 것을 끝까지 붙들어 영생을 잃지 않았다. 약한 믿음의 나약한 모습을 ‘소망’은 우습게 여겼으나, 크리스천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그를 두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강철 같은 믿음과 인격의 소유자처럼 보여도,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는 법. 그 부분에서는 다들 약한 믿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크리스천’의 여행 경로를 표시한 그림.

 

천로역정 최악의 악당

천로역정 전체에서 가장 무서운 악당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한둘이 나오는 게 아니라 고르기가 쉽지 않지만, 나는 ‘절망의 거인’을 꼽고 싶다. 바른길을 떠나 그의 영지에 들어선 크리스천과 소망은 절망의 거인에게 붙들리고 만다. 그리고 절망의 거인에게 견디기 힘든 위협과 협박, 몽둥이 세례를 받는다. 그런데 절망의 거인은 순례자들을 흠씬 두들겨 패지만 직접 죽이지는 못했다. 그저 아내 ‘주눅’(Diffidence)의 조언에 따라 그들을 협박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유혹할 따름이다.

절망의 거인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크리스천이 아니라 뒤늦게 따라온 소망이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이런 장면은 천로역정 이야기 전체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회의와 절망은 신앙의 경륜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오랜 경험과 그 과정에서 축적된 좌절의 무게는 사람을 더욱 짓누를 수 있다. ‘의심의 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뿐이다. ‘약속의 열쇠’다. 이것 참 의미심장하다. 절망의 거인에 사로잡혀 의심의 성에 갇혔을 때, 거기서 벗어날 길은 하나님의 약속뿐이라니.

약속의 열쇠를 사용하지 못했던 많은 이들은 눈이 멀고 말았다. 이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절망에 사로잡힌 자,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만다. 절망에 사로잡히면 (말 그대로다!) 앞이 캄캄해진다. 막막하고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예를 들어, 내가 막막한 상황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늘 떠올리는 말씀이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시 119:105)이라 고백했나 보다. 몇 킬로미터씩 쏘아 주는 서치라이트가 아니다. 한 발 한 발 따라가야 할 등불이다.

 

자기 자리에 머물며 순례의 길을 떠나다

나는 크리스천이 가족을 두고 혼자 순례를 떠난 부분이 전부터 영 거슬렸다. 가장이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방치하고 ‘가출’을 하다니. 안 그래도 ‘뷰티풀 저택’에서 그 문제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다. 가족이 있으면서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 크리스천은 같이 가자고 했고, 수없이 간구하고 애원했다고 해명한다. 하지만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부분이 좀 다르게 다가왔다. 크리스천이 순례 길을 혼자 떠났다고 하지만, 이것이 그가 실제로 가족을 방치하고 가출했다는 의미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상황에 적용해 본다면, 크리스천에 해당하는 사람은 아마 물리적으로는 계속 가족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경제적, 도의적 의무는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되면서 그의 영혼의 순례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같이 떠날 수 없었던 길을 떠나간 것이다. 모두가 같이 가면 정말 좋겠지만, 피치 못하면 혼자라도 떠나야 한다. 귀를 막고라도. 말이 안 통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 결과 천로역정 2부에서 아내 ‘크리스티아나’와 아이들도 결국 순례에 나선다. 그가 앞서간 흔적이 이후 가족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볼 때, 순례자의 길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말이 되겠다. 겉보기에는 그 길이 참으로 평범한 길일 수도 있다. 순례를 떠나지 않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참으로 비범한 길이다. 그가 늘 있던 삶의 자리에서, 늘 하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전혀 다른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걸어가는 길, 다른 것을 추구하며 나아가는 길, 다른 에너지원으로 가는 길에 있으며, 다른 의미를 발견하면서 길을 가고 있다. 그것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나 있는”(시 84:5) 자의 길이다. 순례자의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니매이션 영화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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