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살펴볼 책은 『로드』(The Road)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 역으로 유명한 비고 모텐슨이 주연한 영화(「더 로드」)로도 나왔다. 불바다가 되어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따뜻한 해안을 찾아가는 부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불신과 절망과 혐오와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작게나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세 가지가 긴밀히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오늘 살펴볼 책은 『로드』(The Road)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 역으로 유명한 비고 모텐슨이 주연한 영화(「더 로드」)로도 나왔다. 불바다가 되어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따뜻한 해안을 찾아가는 부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불신과 절망과 혐오와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작게나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세 가지가 긴밀히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먼저 믿음부터 이야기해 보자.

 

(좌)코맥 매카시의 10번째 소설인 , (우)이를 기반으로 한 영화 포스터.

 

믿음

세상이 불타고 거의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남자가 말하는 대로 좋은 사람은 참으로 드물고, 나쁜 사람들이 득세하는 시절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만도 못한 이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목숨을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믿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함부로, 무턱대고 사람을 믿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경계하고 최대한 주의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허점을 보이면 말 그대로 ‘먹힐’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른답게 모든 사람에 대해 늘 조심하는 아버지와 달리, 소년(아들)은 여전히 아이답게 ‘기회만 나면’ 사람을 믿으려 한다. 또래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그와 소통하고 싶어 하고, 그 아이의 미래를 걱정한다. 식인자들에게 갇혀 먹이가 될 처지에 놓인 이들을 구해내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한다. 길에서 만난 눈먼 노인과 먹을 것을 나누고, 그를 보호하고 싶어 한다.

아이는 사람들을 믿을 기회를, 도울 기회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성향이 큰 재산이 되는 시점이 찾아온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아이 앞에 모르는 남자 어른이 하나 나타난다. 그는 아이에게 함께 있던 사람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동안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죽었다는 말에 그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아이가 모르겠다고 하자 자기와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아이는 이 뜻밖의 제안에 이렇게 묻는다.

“아저씨는 좋은 사람인가요?”

소년의 질문에 어른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아빠를 잃고 혼자가 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여기서 아빠 시체와 함께 있든지, 자기 가족과 함께 가든지. 그리고 남는 쪽을 선택하겠다면 길에서 벗어나 있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이런 제안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당연히 소년은 불안하다. 그래서 묻는다.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저씨의 대답이 그것을 말해준다.

“알 수 없지. 그냥 운에 맡겨야지.”

(이 대목을 영화 자막에서 “알 수 없어. 총을 쏴야 할 거야”라고 번역해 놓았다. 책을 안 보고 영화를 봤다면 무슨 소리인가 했을 것이다. “You’ll just have to take a shot”을 그렇게 옮긴 모양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오역이 아닐 수 없다.)

최선의 경계를 하고 주의를 하면서도 어떤 시점에서는 믿어볼 수밖에 없다. 절대 안 속겠다고 버티면, 그것 자체도 덫이 될 수 있다.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속을까 봐 아빠 시체 곁에서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거야말로 확실하게 죽는 길이다. 경계와 의심이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언제까지나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누구를, 무엇을 믿는가가 문제이지 믿음 자체를 아예 거부하고 살 수는 없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 준다.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주어진 단서를 가지고 눈앞의 상대를 판단해야 한다. 아이는 열심히 그 일을 한다. 먼저 질문을 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 불을 운반하세요? 아이들은 있나요? 사람을 잡아먹지 않지요? 아이가 아버지를 통해 경험한 바,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한 셈이다. 남자의 짧은 대답은 아이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래서 아이는 함께 가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짧은 지면에 작가는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행동과 선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다(남을지 같이 떠날지, 남는다면 길에서 벗어나 있으라는 조언까지). 아이를 조종하거나 휘두르려는 생각이 없다(아버지의 유품인 총을 갖고 있게 한다). 약속을 지킨다(아버지의 시신을 담요로 싸는 일을 그가 자청했는데, 아이가 아버지와 작별하러 갔을 때 “남자가 약속한 대로” 아버지는 담요에 싸여 있었다). 상대를 배려하는 인격적인 사람이다(아이가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오랫동안 울도록 기다려 준다).

처음 만난 남자를 믿고 따라가는 아이의 선택은 계속 길을 가라는 아버지의 유언과도 일치하는 일이다. 그리고 믿은 덕분에 아이에게는 새로운 가족과 보호자가 생긴다. 믿음이 아이를 살린 것이다.

 

영화 <더 로드> 스틸컷.

 

소망

이 소설 속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다. 암담하고 암울하기 짝이 없다. 세상은 불타고 살아남은 이들은 상당수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만인이 만인의 늑대가 된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래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절망한다. 어느 집에서는 가족들이 단체로 목을 매단 모습으로 죽어 있다. 소년의 엄마도 절망했다. 다른 집에서는 많이들 자살을 선택한다며 자기들도 그렇게 하자고 남편을 재촉한다. 이대로 가다간 잡혀서 능욕당하고 잡아먹힐 뿐이라고, 아이와 함께 죽자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절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남편이 끝끝내 거절하자 여자는 남편과 아들을 두고 홀로 떠나서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홀로 숨이 끊어졌으리라.

수많은 이들이 절망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망 때문에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식인을 선택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절망하지 않는다. 아이가 없었다면 절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지켜야 할 소중한 대상, 아이가 있다. 아이가 있는 한, 아이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절망할 수 없다. 아이 앞에서 그는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라고. 그것은 약속이자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주인공도 몇 번이나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맞았다. 대표적인 두 장면을 떠올려 본다. 하나는 식인자들이 다른 이들을 먹잇감으로 잡아 놓은 집에 들어갔다가 그들에게 잡힐 뻔했을 때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침 사람이 없는 틈에 그 집에 들어왔던 아버지와 아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식인자들의 모습을 보고 간신히 빠져나가지만 멀리 가지 못한 채 바깥 덤불에 숨는다. 영화에서는 부자가 빠져나갈 틈이 없어서 2층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좀 더 긴박한 상황이 연출된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고민에 빠진다. 이제 끝인가? 여기서 아이가 험한 꼴 당하지 않게, 먹잇감이 되지 않게 내 손으로 죽여야 하나? 내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위험한 순간에도 아버지는 절망하지 않고 버틴다. 덕분에 간신히 부자는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여정은 이어진다.

또 하나는 (영화에서) 오랫동안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들어 하던 그들이 어느 집에서도 음식을 찾지 못하자, 아버지가 절규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두 사람은 먹을 것이 가득한 벙커를 발견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그 집 마당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직감하고 열심히 땅을 파서 벙커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식인자들의 집에서 지하실 문을 땄다가 거기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했던 터라, 이번에는 아들이 열심히 말리고 눈물도 흘리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시간을 좀 줄 뿐,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게 좋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야. 계속 노력을 하지. 포기하지 않아.”

좋은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희망을 잃어버리면 좋은 사람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 막다른 상황이라 절망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오히려 절망해서 막다른 상황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절망하고 주저앉는 순간, 새로운 기회는 닫혀 버리니까.

위에서도 말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같이 데려가 달라는 아이에게 그럴 수 없다며 이런 이유를 댄다. “너는 불을 운반해야 해.” 아이는 그 불이 진짜 있는 거냐고,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되묻는다. 아버지는 진짜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결정적 대사가 나온다.

“어디 있죠?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왜 몰라.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내 눈에는 보이는데.”

아이 본인은 긴가민가하지만, 아버지 눈에는 훤히 보인다는, 아이 안에 있고 늘 있었던 불이 무엇일까? 그 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면이 카트 도둑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부자의 전 재산이 담긴 카트를 훔쳐 달아나던 도둑을 붙잡은 아버지는 분노에 못 이겨 도둑의 옷을 다 벗기고는 그대로 버려두고 떠난다. 진작부터 도둑을 위해 간청하던 아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모든 것을 훔쳐 갔던 도둑을 도와주자고 호소하고, 그 사람은 두려워서 그런 것뿐이라고 변호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결국 매정하게 쏘아붙인다.

“네가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그리고 아들의 대답. “그렇다고요. 제가 그런 존재라고요.”

아버지가 아이에게서 늘 봤던 불이 화르르 타오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생존이 말 그대로 연명에 그치지 않고 인간다운 삶임을 가능하게 하는 불. 생명을 가치 있게 만드는 존엄을 붙들게 하는 불. 모든 일, 즉 다른 사람의 안위와 목숨까지 염려하는 존재로 버티게 하는 불.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그 불을 보았고, 그것을 지켜주고자 했다.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들은 괜찮은 거죠? 우리한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죠?” 이 말에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이는 그런 생각의 근거를 제시하고 나선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아이가 자기 삶의 의미와 사명을 말하는 대목이다. 사람은 의미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 아버지가 봤던 불을 아이 자신도 볼 수 있다면, 아이가 절망하고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를 아이 자신으로부터 지키는 것, 그것이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소망과 바람은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 보자.

 

사랑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모든 것을 걸고 아들을 지키려 한다. 아들 덕분에 희망을 붙들 수 있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그를 또 다른 사랑으로 이끈다. 아들 때문에 도둑에 대한 모진 복수를 그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을 상대로 사랑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소중히 지켜진 아들 덕분에 아버지의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로 조금이나마 퍼지고 그의 인간성도 조금 더 지켜진다.

그 큰 사랑으로 아버지는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다. 책 전체가 그 이야기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몸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그 위대한 사랑으로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진작부터 아버지는 아들에게 홀로 서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자신의 생명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 때가 온다. 더 이상 아들을 돌봐줄 수 없고, 아들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물론 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러나 절망한 아내의 처절한 선택 앞에서도 혼자 아이를 돌볼 때도 절망하지 않았던 그는 이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다. 너 혼자 어떻게 살겠니. 이제 다 끝났구나. 같이 끝내자. 무슨 몹쓸 일을 당할지 모르니 같이 가자.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들은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하는 쪽을 선택한다. 아이에게 계속 가라고, 잘 될 거라고 격려한다.

끝이 다가온 것 같은 아버지에게 아들은 일전에 봤던 작은 아이 이야기를 한다. 그 아이가 길을 잃었던 걸까요?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어느 순간 그 아이 이야기는 바로 아들의 이야기가 된다. 아버지는 선(善)이 그 아이를 찾아갈 거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아들에게 하는 말이다. 부모 능력의 한계가 곧 부모 사랑의 한계인가?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 같은 시점에서도, 아이의 앞날에 대해 절망할 권리, 그의 생명을 포기하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너도 그럴 거라고, 너도 절망하지 말라고.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운이 무엇인가. 아이를 찾아갈 거라는 그 선은 무엇인가.

 

운(運)과 선(善)

이야기의 거의 맨 앞부분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말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들의 존재가 신이 말씀하신 증거라니, 아버지에게 아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강력하게 고백한 셈이다. 신을 거론하는 장면을 하나 더 꼽아보자. 이야기의 뒷부분에서 해변에 이른 부자. 아버지는 배에서 신호탄 총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을 받고 그 총의 용도를 설명한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총이라고. 아들이 묻는다. 총을 쏘면 볼까요? 신 같은 존재가?

이 책 어디에도 신(神)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신화가 아닌 다음에야 이야기에 신이 직접 등장할 리가 있나. 작가가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작가는 작품 속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을 통해, 그들 가운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 가운데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아니 작품 자체가 작가의 증거다. 작품은 저절로 쓰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남자도 모르고 소년도 몰랐지만,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죽고 나자, 그들이 소년에게 다가간다. 이후 위에서 말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아이가 선택을 내리고 아이와 4인 가족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그렇다. 아이는 운이 좋았다. 선한 사람들이 그를 찾아갔다. 운과 선이 만난 것이다. 운과 선은 하나였다.

새로운 가족의 어른 여자는 가끔 신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소년도 신과 말을 하려 했다고 나온다. 여자가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고, 소년이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저자는 신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절망의 세계를 설정해 놓고서, 지속적으로 신을 거론하고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지막 대목에서 신을 아는 이들이 소년에게 사랑과 연대,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신을 안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신을 안다는 당신들이 희망이라고,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은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라 했다(고전 13:13).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절망할 수 없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인 ‘불’을 보았고, 신이 말씀하셨다고 믿을 수 있는 실증을 발견했다. 이 이야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서로를 붙들어 준다는 것과, 그중에서도 제일이 사랑인 이유도 알려주는 것 같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들을 지켰고, 그 과정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희망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켜주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다.

 

영화 <더 로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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