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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웹툰을 따라가다 보면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아, 기독교의 언어가 ‘우리들만의 은어’로 전락할 수 있음을, 어쩌면 상당 부분 그렇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철저히 일상어를 써서 전해졌던 복음의 역사와도, 한글의 보급과 정착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한국 초대교회의 모습과도 멀리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웹툰 <소쩍이 온다>의 작가 박흥용 화백의 신작이 나왔다. 그의 작품은 시대와 배경, 소재는 늘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시선이 낮은 곳을 향한다는 것이다. 힘없는 이들, 힘든 사람들의 사정, 사연, 아픔, 애환이 그려진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해학과 재치가 있고 그들이 맛보는 소소한 기쁨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정말이지 ‘본격적으로’ 낮은 이들을 다룬다. 일단 주인공부터 소개하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주인공이자 화자인 ‘병필’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방구를 지나가는 ‘그녀’를 보기 위해 문방구 게임기에서 테트리스를 끝도 없이 하던 어느 날, 병필은 ‘진짜 아름다움을 보여 주겠다’는 한 살 많은 만수에게 이끌려 만수 삼촌이 운영하는 삼류 극장에 가서 성인 영화를 본다. 그러다 영사기를 돌리던 삼촌에게 걸려 영사실로 불려 올라가 야단을 맞는다. 그리고 펼쳐지는 소소한 대화와 사건들….

 

재미는 있는데 이게 어디로 흘러가나 싶을 무렵, 즉, 1화의 끝부분에 제대하고 편의점에서 알바 중이던 병필에게 만수가 찾아온다. 만수는 병필에게 알바를 제안한다. 엄마의 부탁으로 삼촌을 찾아야 하는데 도와 달라고, 알바비는 넉넉하게 줄 테니 함께 하자고 한다. 그리하여 삼촌 찾기 여정이 시작된다. 삼촌의 마지막 흔적이 발견된 곳이 서울역이었다. 병필과 만수는 삼촌의 단서를 찾아 노숙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독자도 그들의 길을 따라가며 가장 낮은 이들, 노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과 지 선생

 

병필 일행은 노숙자들에게 삼촌에 대해 묻지만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다. 노숙자들은 다 나름의 말 못할 사정에 따라 그 자리에 이른 사람들이다. 과거를 알리고 싶을 리 없다. 서로의 일에 대해 모른 척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섣불리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배신행위다. 병필은 노숙자들에게 여기저기 묻고 다니다가 경고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 노숙자 패거리의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노숙자들이 늘 침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이 많은 이들도 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어 지금 서울역이 다 자기 땅이라고, 내가 허락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누워 있는 거라고 허풍을 떠는 노숙자도 있다. 밥을 안 먹고 산다는 썰을 푸는, 그러나 밥시간만 되면 배식 줄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노숙자도 있다. 말을 안 하는 것 못지않게 허튼소리들을 늘어놓는 것도 자신을 감추고 보호하는 장치일 수 있겠다.

 

하지만 노숙자가 마음을 여는 상대도 있다. 노숙자들의 ‘구원’을 위해 노숙자 ‘사역’을 하는 목사가 그런 사람이었고, 만수의 삼촌(지이수 선생)도 그런 사람이었다. 노숙자의 마음을 얻는 법을 그 목사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지 선생이었다. 노숙자들은 모두 그를 특별하게 여긴다. 어느 노숙자는 노숙으로 내몰린 것을 ‘튕겨져 나왔다’고 표현하고는 지 선생은 노숙자들의 ‘튕겨져 나온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병필과 만수가 어린 시절에 삼류 극장의 유지를 위해 성인 영화를 트는 일을 하던 지 선생. 어느 날 저녁, 그는 누나 몰래 조카 방으로 들어가서는 어린 조카 일행에게 담배꽁초를 주워 오라는 알바를 시킨다. 그걸 모아다가 성경을 찢어 담배를 말아 피려다 그 장면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누나에게 들켜 뺨을 맞는다. 이후로도 줄곧 기독교적 용어, 메시지, 상징은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지 선생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성경으로 담배를 말아 피던 모습은 그의 삶과 신앙의 자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줄까?

 

웹툰 <나도 사람이야> 포스터.

 

번역의 필요성과 사례

 

교회 고등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기독교의 언어가 얼마나 이질적이고 낯선 것인지 거듭거듭 깨닫게 된다. 교회에서 익숙하게 듣고 기독교 서적들을 번역하고 읽으며 숱하게 접하는 신학적 용어들을 벽돌 삼아 문장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것으로는 그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전달하기 힘들다. 목사, 전도사, 기독교 신자들이 ‘대놓고 당당하게’ 등장하는 이 웹툰에는 그런 기독교 용어들이 등장할 때마다 설명을 해준다. 비신자인 병필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또는 각주를 통해서.

 

이 웹툰을 따라가다 보면 번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아, 기독교의 언어가 ‘우리들만의 은어’로 전락할 수 있음을, 어쩌면 상당 부분 그렇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철저히 일상어를 써서 전해졌던 복음의 역사와도, 한글의 보급과 정착에 지대한 기여를 했던 한국 초대교회의 모습과도 멀리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처럼 기독교 용어에 젖어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자신을 낯설게 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웹툰은 기독교의 언어가 얼마나 이질적이고 낯선 것인지, 생생하게 접하게 해준다. 이 작품은 그런 번역의 필요성과 번역의 훌륭한 사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소설계에 이승우가 있다면 웹툰계엔 박흥용이 있다고 할까.

 

서울역 광장이 광야로 보일 때

 

지 선생이 어떻게 노숙자들의 마음을 얻었는지 보여주는 한 장면만 살펴보자. 지 선생이 튕겨져 나온 이들의 처지를 잘 이해한다고 했던 노숙인 할아버지가 병필에게 들려준 사연이다. 어느 날 밤에 서울역 광장에서 자던 노인은 문득 잠에서 깼다. 그냥 눈이 떠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못한다. 잠이 안 오니까 ‘이런저런 과거가 비집고 올라오는’ 바람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진다. ‘아들 생각을 해보려고 했더니 아들 얼굴이 기억이 안 나는’ 기막힌 경험을 하게 된다. 누워서 울음을 토해 내다 눈물 젖은 눈으로 일어나 앉아 있던 그에게 지 선생이 찾아온다.

 

지 선생은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그를 위로한다. 감정에 휘둘려 목이 멘 할아버지에게 생수를 마시라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마시던 물이 갑자기 포도주로 변한다. 깜짝 놀라서 마시던 물을 다시 들여다보니 분명히 물이다. 하지만 다시 물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포도주로 변한다. 분명히 물인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기독교 신자라면 여기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예수님의 기적을 떠올릴 것이다. 지 선생을 새로운 예수로 떠받드는 교주화 작업의 빌드업이 아니라면, 이건 무엇일까? 예수님이 포도주가 떨어져 엉망이 될 위기에 처한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축제가 계속되게 하신 것처럼, ‘인생이라는 잔치를 망쳐버린’ 할아버지의 인생에 잠깐이나마 축제를 회복시켜 준다는 말일까? 아니면 아예 성찬의 포도주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나아가지 않는다. 작가는 이 할아버지의 회상 장면을 화질이 나빠서 비가 오는 것처럼 줄이 그어진 옛날 극장 영화의 장면처럼 그려낸다. 할아버지의 인생 자체를 영화처럼 구성한 것이다. 그러다가 물이 포도주가 되는 할아버지의 경험을 받아서 지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영사기의 필름이 장력이 틀어지면 필름이 끊어질 수가 있어요. 필름이 끊어지면 순간, 영화에 푹 빠져 있던 관객들은 갑자기 현실로 튕겨져 나오게 되니까 영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낍니다.”

 

지 선생은 지금 할아버지가 처해 있는 현실이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이 포도주가 된 그 장면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영화 내용에 취한 관객을 비어 있는 스크린이 그렇게 가끔 깨워요. 관객들은 갑자기 현실로 튕겨져 나오게 되니까 영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낍니다.” 이런 현실과 영화의 도치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흠뻑 취해 있던 삶으로부터 이렇게 튕겨져 나오면 이 광장이 광야로 바뀝니다.” ‘이 광장이 광야로 바뀝니다’라는 대사가 흘러갈 때, 그들 앞에서 걸어가던 비둘기들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눈앞에 광야, 즉 사막이 펼쳐진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지 선생의 말을 “광야엔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이 있지만”까지만 전해 주고 입을 닫는다.

 

노숙자가 광장을 그냥 광장이 아니라 광야로 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광야는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이 있는 곳이지만 그 외의 다른 것도 있는 곳이다. 성경에서 광야는 자신의 한계를 직면하는 자리이자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다. 광장을 광야로 보게 되면, 아니 광장이 광야로 보이게 되면, 그때부터는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지 선생은 노숙인 할아버지에게 그런 개안(開眼), 신 현현의 경험을 제공한 사람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병필과 만수를 따라 지 선생의 행보를 추적하다 보면, 그가 어떤 일을 겪었고,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가 하나씩 풀려나간다. 앞으로 더 드러날 사실들이 기대가 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병필은 온갖 만남과 경험을 통해 과연 어떤 변화와 성장을 하게 될지도 궁금해진다. 겨우 10회밖에 안 나온 웹툰을 지금 소개해서 어쩌자는 거냐고? 어디로 흘러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건 같이 그 여행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는 초대다. 지 선생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왠지 세상에 낯설어진 기독교의 언어가 생명력을 얻는 비결을 한 가지 보게 될 것 같아서다. 아니, 그 정도까지 아니라도 괜찮다. 최소 몇 달 동안 사소하지만 행복한 기대를 안고 살 수 있는 건수가 하나 더 생긴 셈인데, 이런 재미는 나눠야 제맛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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