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마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개인 신자가 칭의를 받더라도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듯이, 사회적 칭의로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성화의 과정을 통해 온전히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성화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 공동체인 교회의 복음 전파와 사회적 참여를 요구합니다. 사회적 성화를 위하여,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성령의 인격적 임재의 사역)이 필요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회 정치적 섭리를 통한 하나님 나라 사역(성령의 초인격적 사역)도 필요합니다.(본문 중)

현요한(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성찰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며,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우리에게 도래하여 우리 안에서 확장되고 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완전히 이루어질 나라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 나라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음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일종의 사회적인 칭의요 사회적 성화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 가난하고 소외되고 압제당하고, 죄인 취급당하는 이들에게도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주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많은 유대인 추종자들이 기대했던 어떤 전쟁이나 폭력적 혁명을 주장하거나 실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사람들에게 전적인 회개와 전적인 믿음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전진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16세기 개혁자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빌려서 말하자면,1)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의미에서 사회적인 칭의인 동시에 사회적인 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긍정이기는 하지만, 세상 그 자체보다 그 세상에 도래하는 하나님 자신의 통치에 대한 강력한 긍정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지금 그대로의 세상의 모습이 잘못되어 있다는 강한 부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끌고 세상에 오셨다고 해서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사회적 ‘칭의’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은, 그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처럼 들렸을 수도 있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로마의 식민지였고, 수많은 백성들이 아직도 불의한 압제와 가난과 고통 속에 있는데, 아직도 인류는 온갖 죄악 가운데 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것은 자칫 헛된 망상처럼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셨고, 성령이 임하셨기에, 그리하여 악령들이 추방되고 놀라운 치유가 일어나고 있기에,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 통치와는 다른 방식으로지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선하고 혁신적인 선언이요,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놀라운 희망이요 비전이었습니다. 우리 각 개인이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듯이, 아직도 불의하고 어두운 세상이, 오직 은혜로, 벌써 하나님 나라가 거기 도래했다는 선언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 나라는 장차 올 것이기도 합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성숙해져 가는 것은 사회적 ‘성화’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하나님의 영적 통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루어져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마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개인 신자가 칭의를 받더라도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듯이, 사회적 칭의로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성화의 과정을 통해 온전히 실현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성화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 공동체인 교회의 복음 전파와 사회적 참여를 요구합니다. 사회적 성화를 위하여,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성령의 인격적 임재의 사역)이 필요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회 정치적 섭리를 통한 하나님 나라 사역 (성령의 초인격적 사역)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성령이 일하시는 방식임을 인정하고, 이 일들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둘은 하나가 되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천년왕국 이야기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제로 시연하시는 충분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서, 개인적 칭의와 성화의 복음으로 접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복음이 ‘하나님 나라’ 복음임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우주적 교회론을 통해서 세계 모든 나라들과 모든 만물들을 다 포괄하는 공동체, 즉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놓지 않습니다(골 1:15-20, 엡 1:20-23).

사도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요 3:3-5). 태어난다는 것은 항상 어떤 공동체 안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태어남은 한 가정 안으로 태어남이요, 한 국가 안으로 태어남입니다. 영적인 태어남은 하나님의 가정 안으로 태어남이요, 교회 안으로 태어남이요, 하나님 나라 안으로 태어남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들어가지만,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된 사람은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활하라’라는 말은 ‘폴리튜오마이’(πολιτευομαι)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생활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전통적 개인 구원 신학과 진보적 사회 참여 신학이 만날 수 있습니다. 개인 구원은 중요하지만, 그에 대한 강조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도외시하거나 해소(解消)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사회 참여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개인 구원 혹은 영혼 구원 신학을 대치하거나 해소할 수 없습니다. 개인 구원 신학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개인적 칭의와 중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 사람들은 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실현해 나가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성화인 동시에 사회적 성화를 요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성화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삽니다(갈 5:22-23).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체현하신 ‘하나님을 본받는 것’(엡 5:1)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용어를 빌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벧후 1:3-4)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옛날 헬라 교부들이 신화(神化, deification)의 교리로 말하려고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이 되게 한다는 신화 교리는 개신교적 관점에서는 지나친 것으로 보입니다. 개신교적 관점에서는, 보다 적절하게, 청교도 신학자들이 ‘거룩한 습성(habit)의 형성’에 관한 교리로써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 그것은 성령의 은혜와 경건의 훈련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 나라 시민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 시민의 성품을 따라 살면서,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 생명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사회적 성화는 정의와 평화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실현되는 나라, 새로운 생명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도와 선교, 사회적 봉사와 참여를 요구합니다.

세상의 칭의와 중생과 성화는 세상 안에 있는 교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집니다.3)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방법과 과정도 하나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 혁명과 전쟁과 반란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으로 보여 주신 것처럼 사랑과 섬김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부활의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과 그 여파로 경제적인 고통을 겪고 있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지라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 나라가 감추어진 가운데 전진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거기에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 있습니다.


1)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선포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서 개인적 칭의와 성화의 복음으로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비전을 놓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5-20).

2) John Owen, The Holy Spirit: His Gift and Power, 이근수 역, 『개혁주의 성령론』(서울: 여수룬, 1991) 참조.

3) 본회퍼는 “서구 세계가 그 역사적이고 정치적 형태로서, 오직 교회의 믿음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칭의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Dietrich Bonhoeffer, Ethics, Dietrich Bonhoeffer Works vol. 6, trans. by Reinhard Krauss, Charles C. West, and Douglas W. Stott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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