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그 정체성대로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만 그렇게 살 수가 있습니다. 왕으로 살려고 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왕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살면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빛이기 때문에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 중)
조주희 목사(기윤실 공동대표, 성암교회)
모두가 염려하며 2022년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와 선거를 비롯한 커다란 이슈들이 가득한 상황이기에 당연하다 싶기는 합니다. 해마다 연말과 연시가 되면 화젯거리 중의 하나가 <교수신문>에서 발표되는 사자성어입니다. 역시 염려가 가득 담긴 용어가 발표되었습니다. <교수신문>에서는 ‘묘서동처’(猫鼠同處)를 선정했습니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라는 의미로 ‘도둑을 잡아야 할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된 것’을 비유한 사자성어랍니다.
이 말은 중국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舊唐書: 당나라(唐)의 정사(正史)로 24사(二十四史) 가운데 하나]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 책에 의하면 한 지방 군인이 집에서 고양이와 쥐가 같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그 쥐와 고양이를 임금에게 바쳤답니다. 이것을 보고 대부분 관리는 ‘복이 들어온다’라며 기뻐했으나 그중에 한 관리는 ‘도둑을 잡는 자가 도둑과 한통속이 된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제 본성을 잃은 것’을 가리킨다고 바른 소리를 했답니다.
이 사자성어의 추천자인 최재목 교수는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각처에서 또는 여야 간 입법과 사법, 행정의 잣대를 의심하며 불공정하다는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국정을 엄정하게 책임지거나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시행하는 데 감시할 사람들이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과 한통속이 돼 이권에 개입하거나 연루된 상황을 수시로 봤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고양이는 고양이이고 쥐는 쥐인 것이 당연한데, 이 당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꼬집는 내용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한번 질문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늘 나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본분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이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 말씀의 무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상당수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소금과 빛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의 소금 됩시다. 빛 됩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소금과 빛이 되지 못했다는 전제가 깔린 표현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을 소금과 빛으로 여기기에는 함량 미달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소금 됨과 빛 됨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소금 됨과 빛 됨의 삶을 살아내면 소금과 빛이라고 불러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이니 소금으로 살라고 말씀하셨고, 빛이니 빛으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그 정체성대로 살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만 그렇게 살 수가 있습니다. 왕으로 살려고 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왕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살면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빛이기 때문에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2년에 우리는 두 가지 질문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와 나머지는 ‘나는 내가 나를 정의한 대로 살아내고 있는가?’입니다. 시대가 어렵고 어두우므로 이 질문은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세상은 우리에게 이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022년은 이 질문을 분명하고 던지는 동시에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는 과제를 푸는 해이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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