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중년 무렵에 이르러 이대로 계속 살아도 되는 건지 확신할 수 없고, 이게 원래 자신의 모습인가 싶어 깊은 상실감에 빠지기도 할 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더해진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자기 또한 세속에 너무 물든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오히려 세상이 나를 변화시킨 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했습니다』, 『비로소 내 마음의 적정 온도를 찾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바야흐로 ‘나’가 화두가 된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어느 날 서점에 들렀다가 에세이 코너에 빼곡하게 꽂힌 ‘나’로 시작하는 책 제목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가운데 이처럼 ‘나’에 대한 관심 또한 부쩍 늘어났다. 하긴 나도 글이 쓰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고, 게다가 나처럼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자기를 숨기는 방식의 글을 쓰는 것과 달리, ‘나’를 드러내는 형식의 글을 쓰고 있으니 제법 시대의 흐름에 충실하다 하겠다.

 

시대의 흐름에 충실하다. 이 표현에 움찔하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름지기 기독교인은 시대를 거슬러야지, 시대를 따라서는 안 된다고 배우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된 옛날 일이 하나 있다. 수련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계곡에서 쉴 때였다. 물살이 세차게 아래로 흐르는 층진 바위들 틈새로 자그마한 물고기 떼들이 열심히 그 흐름에 맞서서 위로 헤엄쳐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같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배가, 저렇게 세상의 흐름에 애써 역행하려 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수련회의 감동 끝다운 말이었다. 나의 청년 시절 대부분을 추동했던 큰 줄기의 가르침은 그러했다. 세상을 거슬러 살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그런 메시지의 반복이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중년 무렵에 이르러 이대로 계속 살아도 되는 건지 확신할 수 없고, 이게 원래 자신의 모습인가 싶어 깊은 상실감에 빠지기도 할 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더해진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자기 또한 세속에 너무 물든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오히려 세상이 나를 변화시킨 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청년의 그 ‘순수한 때’의 헌신을 복기하려고도 하지만, 청년이라는 말이 환기하는 그 모든 풋풋함의 이미지를 중년의 몸이 배신한다.

 

기독교로 귀의한 지 10년, 히포의 주교로 봉사한 지 2년이 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쓸 때 그의 나이 마흔셋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고백’이라는 말을 들을 때 죄의 고백을 자동적으로 상기하지만, 이 책은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얻은 기독교의 승리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최초의 자서전이라고 일컫는 이 책을 논하면서 미국의 작가 퍼트리샤 햄플(Patricia Hampl)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친구에게 자기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면서 글을 쓰고 글을 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던 글을 인용한다. 그런 사람이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은 살지 않는다는 것”을 (햄플에 의하면) 의미했다. 그러한 위기감에서 『고백록』이 나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단테가 똑바른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에 선 것 같은 시기로 묘사한 중년의 나이다. 햄플은 “이 위치—불확실하고 심지어 고통스럽기도 한 성인기의 중간 지점—에서 자서전은 탄생한다”라고 말한다.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때와의 마주침이다. 아직 연륜이 부족해서 불안한 20대를 지나, 사는 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30대도 지나서,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그 지점. 항간에 청년들 사이에서 비웃음거리가 되는 “라떼는 말이야…”의 복기는, 인생의 그 지점에서 발신되는 신호는 감지하지만 어떻게 처리할 줄 몰라 ‘나 때는,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말이야’를 반복하는 고장 난 테이프 같은 중년의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중년의 일인칭 서사는 이처럼 다른 연령대와는 다른 어떤 운명적 조합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교회에서는 중년이 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로지 청년, 새벽이슬 같은 청년,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청년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세차게 흐르는 물을 거슬러 헤엄치려 애를 쓰는 물고기 같은 청년을 본받으라고, 혹은, 그때의 자신을 생각하며 분발하라고 다그치는 것이 중년을 일깨우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그러나 중년이 돌아보아야 할 것은 청년 때의 열정과 순수함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자기를 돌아보았던 것은 회심 때의 열정을 복기하고 그것이 사라진 지금을 다그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백적 회고를 통해 찾고자 한 자기는 사명에 불타는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근원 앞에서 감탄하는 자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자신이 그 근원의 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마치 저 대양을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와 같은 평안을 느낄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는, 갈망이 추동하는 글쓰기였다.

 

그날 계곡에서 후배의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물고기들의 몸짓은 세파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대세를 역행하려는 무모한 몸짓 아니냐고 응수했는데, 제법 설득력이 있었던지 후배는 크게 웃었다. 아직 결혼 전이고 20대였던 후배와 결혼하고 이미 몇 차례 유산을 겪은 30대의 나는 아무래도 경험으로나 물리적 나이로나 중년에 훌쩍 가까워 있었기에, 청년의 자산을 나에게서 찾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평생 계발할 것이 청년의 자산뿐이라면 우리에게도, 실제로 청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참 불행할 것이다. 가진 게 청춘뿐인 세대의 자산을 다른 세대가 전유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거니와, 청년이 바라볼 미래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묘하게도 이 청년의 이미지에는 여성이 없다. 중년의 남성이 청년 정신을 외칠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평생 청년을 동경하며 자라지 않는 남편을 자식처럼 지켜봐야 하는 아내들의 속사정을. 그래서일까. 중년의 글쓰기 붐을 타는 사람 중에는 여성들이 많다. 그 옛날 수다의 치료 효과가 지면으로, 컴퓨터 화면으로,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옮겨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글과 글쓴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글은 드러내 보이기 매우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지어낸 다른 어떤 것보다도 글에 대한 비판은 속이 쓰리다. 그런데도 많은 여성이 글을 쓰기를 희망하고,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글을 출판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들이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작품으로 남을 무엇을 쓰기를 바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 또한 다분히 남성적이다. 내 주변에서 글을 쓰는 여성 중에는 작품을 쓰겠다는 사람보다 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나아가 자신의 글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여기에서 구원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거창한 구원은 한 분께서 이미 다 성취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서로를 돕는 작은 구원을 베풀 수 있으면 된다.

 

벌써 2년이 넘게 줌으로 하고 있는 소박한 글쓰기 모임이 있다. 심지어 매번 글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글을 써보겠다는 의지들이 있어서 수다 같은 대화가 그냥 수다로 끝나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한 번씩 감동적인 글이 나오기도 하고, 그 글이 또 다른 대화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때로 목적을 상실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 모임이 이렇게 오래 가는 것도 사실 좀 신기하다. 글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내 또래의 여성들에게 던지는 무엇인가가 확실히 있나 보다. 만약 우리가 어느 순간 부지런을 떨어 글이 좀 쌓이게 된다면, 그 책의 제목은 또 어떤 ‘나’를 달고 서점의 여러 ‘나’와 함께 서가에 꽂힐 수 있을까. 『나도 쪼끔은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내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비로소 내 신앙의 적정 온도를 찾다』? 『내 신앙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이러한 소박한 글쓰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어떤 대단한 선언도, 훈수도, 자기 정당화도 아닌, 우리 자신이 살아가기 위한 이야기이다. 고장 난 테이프처럼 ‘라떼는 말이야’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돌아봄이다. 20대의 나는 30대, 40대의 인생을 상상할 수 없지만, 그 나이에는 그 나이의 인생이 있다는 것을 그즈음에 달해 보면 알게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부지런히 풀면서 또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뿌리고 가는 빵 부스러기 같은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길을 찾는 단서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그대로 썩어 거름이 되어 그 땅에서 자랄 또 다른 무엇을 탄생시킬지 누가 알겠는가. 생명(life)이란 그렇게 삶(lives)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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