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과정에서 기독교가 독재 권력과 결별하는 척하며 민중에게 아첨한 것은 말 그대로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반성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속에서 통렬한 자기반성을 한 이도 없지 않겠지만 조직체로서의 교회, 혹은 시스템으로서의 기독교가 입장을 바꾼 것은 심상치 않은 민중의 분위기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본문 중)
손승호(한국기독교역사문화재단 사무국장)
4‧19 혁명이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왜 기독교는 이 역사적 사건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는지 등 기본적으로 알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들은 옥성득 교수의 글을 참고하자. 불친절하고 짧은 이 글에서는 이런 서론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빛보다 빠른 태세 전환
여기 4‧19 혁명 당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를 다룬 두 개의 논평이 있다. 일단 본문을 읽어보자.
민주당의 의견에 찬동하여 데모를 하는 군중이나 학생들을 경찰의 눈으로 볼 때에는 공산당이나 같이 보였을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쏘게끔 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말하면 민주당을 동정한다고 볼는지 모르나 민주당도 하나의 당임으로 마찬가지이다. 만일 현재 민주당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가정하고 야당인 자유당이 이러한 데모를 하였으면 어떻게 하였을까. 필자는 민주당도 쏘았으리라고 단정한다.1)
양과 같이 온순하고 순종 잘하고 애국정신이 강한 우리 학생들이 자기들이 배운 공민과 우리 사회가 다르다고 데모를 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라고 공산군 숙청하도록 총을 쏘았으며 고문을 하였으며 그들의 부르짖음이 좀 과하다고 한들 무슨 죄를 지었기로 제 오렬의 선동에 놀았다는 소리를 하였는지 이해하기 곤란하며….2)
하나는 총을 쏠 만한 상황이었던 것 같으며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더라도 발포했을 것이라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무고한 학생들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한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럼 이 두 상반되는 논평을 낸 언론은 각각 어디일까? 재미있게도 두 논평은 같은 언론사의 것이다. 바로 지금은 「한국기독공보」로 이름을 바꾼 「기독공보」이다. 심지어 두 글의 저자도 같은 사람이다. ‘치악산인’이라는 필명을 쓰는 사람인데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이 굉장한 변신은 거의 언론사 폐업 후 재창간에 가까운 수준이지만, 사실 이런 일은 언론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파리의 언론이 나폴레옹의 유배지 탈출부터 파리 입성까지의 과정에서 보였던 드라마틱한 태세 전환을 상기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암튼 이왕 본 김에 같은 언론사에 같은 필자가 5월에 쓴 문장도 보자.
4월 26일로 일당 독재 정치는 장송을 고하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시작이 되게 되었다. 국민은 누구든지 통쾌스러운 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이다.3)
이쯤 되면 점입가경이라 할 것인데 이런 급격한 태도의 변화는 기독교 전반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교회 연합 기구였던 한국기독교연합회(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선거 때마다 사실상 이승만을 위한 선거 운동 기구나 다름없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몰락 기미가 보인 4월 22일, 연합회는 “우리는 과거 일제에서 해방케 하시고 또 공산 침략에서 건져주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끝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오늘 또다시 강압 정치의 철쇠를 끊어 주셔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의 존중을 회복할 수 있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4) ‘탈룰라’의 기독교 버전인 셈이다.
기독교는 왜 바뀌었을까
그럼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당시 기독교는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유착 관계에 있던 정치 세력과 손절했을까. 회고록과 평전 등에서 원인을 찾아보자. 다음은 강원용 목사의 회고이다.
자유당 정권과의 밀월 관계 때문에 기독교계는 그 무렵 쏟아지는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사실상 많은 기독 학생들이 4‧19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 선거에 기독교가 협력했다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 전체가 싸잡아 비난을 당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종로 기독교 회관 앞에서는 부정 선거 협력에 대한 항의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다. 또 기독교에 대한 항의로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4‧19 희생자 위령제도 불교식으로 치러졌다.5)
그러니까 당시의 시위대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건물로 몰려와서 항의 데모도 하고 위령제도 기독교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불교식으로 치렀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기억은 강원용만 가진 것이 아니다. 다음은 김관석 목사 평전의 내용이다.
4‧19 혁명 때 김관석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시 김관석은 종로2가 기독교서회 건물 2층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독교서회 빌딩은 서울 YMCA 맞은편에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경무대로 향하는 성난 시위대가 기독교서회 빌딩을 가리키며 때려 부수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서회 빌딩에는 기독교서회, 기독교방송(CBS), 한국기독교연합회 등 한국 기독교의 핵심 단체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김관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교회가 그토록 시민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다는 사실,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
이 종로2가의 기독교서회 건물에는 앞서 언급한 「기독공보」도 입주하고 있었다. 이런 기억은 더 있다. 당시에는 청년이었던 조화순 목사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데모하는 학생들이 교회에 불을 지르러 가자”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7) 여러 회고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기독교를 향한 공격을 논의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 아주 일부가 항의 데모로 이어졌다. 이는 당시 한국 교회가 이승만 혹은 자유당과 분리된 집단으로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4‧19 혁명을 반기독교 운동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다.
4‧19 혁명 과정에서 기독교가 독재 권력과 결별하는 척하며 민중에게 아첨한 것은 말 그대로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반성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속에서 통렬한 자기반성을 한 이도 없지 않겠지만 조직체로서의 교회, 혹은 시스템으로서의 기독교가 입장을 바꾼 것은 심상치 않은 민중의 분위기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이 사태의 면피를 위한 성명서, 대국민 사과 같은 것이 이어졌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았을 리 없다. 이번에는 「기독공보」의 한탄이다.
여기서 우리 각자가 반성할 것은 왜 그때는 말 한마디 못 하고 이제야 겨우 애국심을 발로 하는 것처럼 날뛰게 되였느냐는 것이다.8)
너무 쉽게 꿇리는 교회의 무릎
4‧19 혁명에 대해 교계에서 이야기할 때, 필자는 대체로 비슷한 내용을 말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이 친 기독교적이었고 핵심 세력에 기독교 신자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다양한 특혜를 누렸으며, 4‧19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후 사회의 비판에 직면했다는 이야기이다. 역사의 오점에 대한 반성인 셈이다. 그 반성은 언제나 국가 권력에 지나치게 유착하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권력과의 유착은 정의롭지도 선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반성은 현실에 그다지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교회의 정치권력 사랑은 그 끝이 안 보인다.
4‧19 혁명에서 국가 권력에 빌붙어 있던 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민중 권력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하나는 유착, 하나는 반성의 모양새이지만 이것이든 저것이든 권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오히려 반성을 통해 더 크게 잃은 것이 있다. ‘체면’이다. 근래에 들어 이승만 정권과의 유착을 반성했던 교계의 목소리 역시 그저 말뿐인 말로 허공에 뿌려지고 있기에 이 ‘체면’을 다시 세우기에 역부족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여기저기에 무릎만 꿇고 있을 뿐, 스스로를 더 존경스러운 존재로 만들 의지가 없어 보인다.
종교가 사회에서 존경받기 위해 뭐가 필요한가에 대해 다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도덕성, 자선, 시민적 품성, 사회적 영향력 모두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절대 지켜야 하는 것은 ‘체면’이라고 생각한다. 맹자는 그의 사상의 핵심인 사단, 즉, 인의예지를 이야기하면서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으로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수오지심’을 말했다. 동양 철학에 무지한 자의 창의적 오독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수오지심’을 가지기 위해 ‘체면’을 차릴 필요가 있겠다. 만약 정의롭고 선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원한다면 일단 체면부터 차리자. 매일 세 번씩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는 심지어 예수를 믿는 엄청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오 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1) 치악산인, “[주간수상] 당화처참”, 「기독공보」, 1960. 3. 28.
2) 치악산인, “[주간수상] 불우학생”, 「기독공보」, 1960. 4. 25.
3) 치악산인, “[주간수상] 자비심 투쟁”, 「기독공보」, 1960. 5. 2.
4) 윤경로, “분단 70년, 한국 기독교의 권력 유착 사례와 그 성격,” 「한국기독교와역사」 44호(2016. 03.), 37.
5) 강원용, 『빈들에서–2』(삼성출판사, 1995), 129.
6) 김흥수, 『김관석 목사 평전: 자유를 위한 투쟁』(대한기독교서회, 2017), 95.
7)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여신학자연구반 편, 「고난의 현장에서 사랑의 불꽃으로」(대한기독교서회, 1992), 52.
8) “[사설] 각각 자기 일을 하라”, 「기독공보」 1960. 5. 16.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