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아메드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고 도움을 요청한다. 아메드는 그동안 뿌리쳐 왔던 선생님의 손을 잡고 눈물 어린 사과를 한다. 아메드는 그제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이때 화면이 비추고 있는 것은 지하드에 임한 무슬림 전사가 아닌, 그저 어린 소년이다. (본문 중)
최주리(청년활동가)
진정한 무슬림, 아메드
벨기에에 사는 13살의 아메드는 ‘진정한 무슬림’이다. 히잡을 쓰지 않고 술도 마시는 엄마나, 돌봄교실에서 아랍어를 쿠란이 아닌 가벼운 노래로 가르치고 남학생들과도 거리낌 없이 악수를 하려는 이네스 선생님과는 다르다. 아메드는 사촌이기도 한 이맘1)이 전하는 강경한 가르침에 푹 빠져 좋아하던 게임도 그만두고 매일 하루에 다섯 번씩 꼬박꼬박 기도하고 이슬람이 아니거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배척하며 철저하게 ‘진정한 무슬림다운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자신처럼 살지 않는 이네스 선생님을 점점 용납하기 어려워지고, 게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이맘도 마지막 날에 지하드가 일어나면 선생님은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메드는 신앙심이 깊고 충성스러운 무슬림으로서 중요한 일을 하기로 결단한다. 손을 깨끗이 씻고 알라에게 기도한 뒤 안경이 떨어지지 않게 고무줄로 묶고 양말에 작은 칼을 말아 숨겨 넣는다. “알라여, 당신을 위한 나의 믿음을 받아주소서.”
신의 이름으로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신을 따르는 곳에는 순수한 열정이 넘치는 이들이 있어 왔다. 그들의 실천력과 용기로 인해 크고 작은 기적이 일어나고 신의 말씀이 전파되었다. 동시에 신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거짓말과 폭력을 행하고, 민폐를 끼치거나 용인하기도 했다. 많은 종교들이 교리에서는 사랑과 평화를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종교로 인한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믿음과 순수함,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 과격한 방법을 써서라도 근본적 신념을 지키려는 급진성이 뒤섞여 종교는 갈등의 온상이 되었고, 예수님은 그런 갈등을 낳는 당시의 극단적 교리들을 무효화하셨고 장벽을 뛰어넘는 사랑을 가르쳤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 갈등 때문에 시작되었거나 종교적 맥락에서 일어난 분쟁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깊어진 시리아 내전과 예멘 내전, 이슬람과 기독교, 유대교의 갈등이 응축되어 지금까지도 위험한 상황을 만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불교와 힌두교의 갈등으로 시작되어 30년간 지속된 스리랑카 내전, 인도의 힌두교도와 파키스탄의 무슬림 간 갈등으로 대표적인 분쟁 지역이 된 카슈미르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부족이나 국가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곳곳에서도 크고 작은 종교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던 아메드가 테러범이나 살인 미수범, 혹은 성전(聖戰)의 전사로 뒤바뀌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깨닫는 것
아메드는 자신만의 지하드2)를 위해 이네스 선생님의 집으로 향한다. 영화는 긴장으로 어색하게 굳은 표정과 태도의 아메드를 비추며 불안을 증폭시킨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메드를 반기는 아네스 선생님의 뒤에서 아메드는 ‘신은 위대하시다’3)라고 외친 후 칼을 들고 달려든다. 하지만 너무 긴장할 탓일까. 아메드를 뿌리치는 선생님의 저항에 칼을 떨어뜨리게 되고 아메드는 계획 완수에 실패하고 도망친다. 겁에 질려 찾아간 이맘은 자신이 추방될까 봐 걱정하며 자신은 배교자인 선생님을 죽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면서 발을 뺀다. 결국 아메드는 소년 보호 시설에 가게 되고 이맘도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보호 시설에 수감된 아메드는 보호 시설의 목적이기도 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깨닫기 위해’ 농장 일을 돕고 또래에게 아랍어를 가르치는 활동을 하게 된다. 농장에서 만난 루이즈를 좋아하게 되고 얼떨결에 키스를 하게 되지만, 그동안 자신이 배척해 왔던 무슬림이 될 생각이 없는 여성과 결혼하지 않고 스킨십을 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아메드는 흔들리는 자신의 믿음을 다시금 증명하기 위해 실패한 지하드 임무를 다시 완수하기로 결심한다. 일과 시간 중에는 성실하게 일을 하고 고분고분하게 행동하면서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변화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지만, 농장에서 훔친 칫솔 끝을 타일에 갈아 날카롭게 만들면서 이네스 선생님을 만날 기회를 노린다.
평범해 보이는 아메드가 어쩌다 살인을 결심하게 되는 급진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영화는 아메드가 왜 그런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보여 주지 않는다. 부모의 불화나 불운한 어린 시절, 학교 폭력이나 사회 부적응 등의 이유를 들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서사를 부여하는 연출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순수 악이나 순수 선으로 여기게 될 때 자연스레 생길 수 있는 맹목적인 편견 또한 거부한다. 영화는 아메드의 이전 서사에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과거나 원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고민하도록 이끈다.
그저 소년, 아메드
기회만 노리던 어느 날 결국 아메드는 농장에서 도망쳐 나와 버스를 타고 이네스 선생님이 있는 돌봄교실로 향한다. 아메드는 벽에서 화분을 고정하는 못을 뽑아 옷 안에 숨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다. 열려있는 창문을 찾기 위해 높은 벽을 타던 아메드는 발을 헛디뎌 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극심한 통증에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울면서 간신히 기어서 품에 있던 못으로 파이프를 두드리고 곧이어 그 소리를 들은 이네스 선생님이 아메드를 발견한다.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아메드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고 도움을 요청한다. 아메드는 그동안 뿌리쳐 왔던 선생님의 손을 잡고 눈물 어린 사과를 한다. 아메드는 그제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이때 화면이 비추고 있는 것은 지하드에 임한 무슬림 전사가 아닌, 그저 어린 소년이다.
나의 신은 누구인가?
맹목적인 신앙은 결핍으로 결핍을 채우려는 것과 같다. 자아를 신앙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과 순종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가 아닌 자녀로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고 대화할 수 있다. 교회 내에서도 궁금하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거나 눈치만 보게 만드는 질문들이 있다. 안전한 교회 공동체 내에서 궁금증을 바르게 해소하고 잘못된 생각을 다듬어 가며 내 신앙과 나의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없다면, 그 질문들은 거대한 댐에 난 작은 균열처럼 언젠가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에 신앙이나 공동체를 무너지게 만들거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 채로 남이 보여주는 가짜 하나님에게 끌려다닐 수 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구름 너머에서 우리가 죄를 짓는지 감시하는 판옵티콘4)의 간수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련한 질문에도 관심을 가지시며, 미숙한 생각도 품어주시고, 올바른 길을 찾기까지 방황하더라도 정말 위험한 곳으로 떨어지지는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신을 ‘다른 사람을 해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신앙을 증명하는 것을 기뻐하는 존재’로 만든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인간의 어리석은 가르침일 뿐이다.
1) 아랍어로 ‘지도자’라는 뜻이다.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 단어를 각각 다르게 사용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수니파가 사용하는 뜻대로 ‘이슬람 공동체의 예배를 인도하는 지도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참고로 시아파에서 이맘은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하마드와 이슬람 최고 지도자(칼리파)였던 알리의 혈통에서 난 최고 지도자를 뜻한다.
2) 아랍어로 ‘성전’(聖戰)이라는 뜻이며, 이슬람을 지키고 전하기 위한 투쟁을 뜻한다.
3) 아랍어 ‘알라후 아크바르’는 이슬람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최상의 표현이며 일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테러 전에 외치는 모습이 보여지면서 전투나 공격 전에 외치는 표현처럼 알려진 경우가 있지만, 기독교의 ‘할렐루야’나 불교의 ‘나무아미타불’과 같이 기도와 예배 등에 자주 쓰이는 기도 문구이다.
4)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감옥 형태로, 원형 감옥의 중심에서 감시자들이 외곽에 있는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형태이다. 중심은 어두워서 수감자들은 감시자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수감자들은 늘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은 압박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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