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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극단적 포퓰리즘으로 인한 정치적 양극화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극단적 포퓰리즘과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지향과 노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것은 결국 왜곡된 정치적 주장과 건강한 정책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 의식의 문제이며, 이를 위해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본문 중)

 

박성철1)

 

근대 민주주의가 등장하여 시민의 투표권을 보장한 이래 선거는 언제나 다양한 정책 경쟁의 장(場)이었다. 하지만 정책이 정치 문제에 대한 시민의 합리적인 결정에 필요한 원칙이나 규율을 제공하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오직 시민들의 표를 얻기 위한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할 때 선거는 정치를 변질시키는 역할을 했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각 정당이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드는 선심성 정책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다. 이번 총선 레이스가 초기부터 극심한 혼탁 속에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정책의 도구화가 극에 달하였기 때문이며, 이는 지난 2년 동안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 진행된 정치권력과 검찰 권력의 사유화가 만들어낸 정치적 양극화의 결과이다.

 

정치적 양극화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회의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 포퓰리즘’(extreme populism)을 통해 심화한다. 사실 양자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자가 강해질수록 후자는 더욱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극단적 포퓰리즘은 현재 한국 정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뿐 아니라 전(全)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극우 정치 세력과 결합하여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포퓰리즘은 과거 단순한 ‘대중인기영합주의’로 이해되던 현상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 정치적 지향과 관계없이 대립적 위치에 있는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 남용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너무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혹자는 이 용어를 20세기 초와 같이 엘리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 이념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포퓰리즘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반민주주의적 경향의 정치 현상이며,2)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부추겨지고 있다.

 

하지만 성서의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포퓰리즘과 같은 왜곡된 정치 현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도, 외면해도 안 된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인은 왜곡된 현실 속에서도 “변화시키는 종말론”과 “종말론적인 그리스도론”을 기반으로 하는 희망의 윤리를 지향해야 하며, 이는 예수를 뒤따름으로써 “그의 미래를 선취하는 윤리”로서 왜곡된 현실을 변화시킨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기독교적 희망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하며, 이를 통해 왜곡된 정치적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상의 일부 정치 선동가(Political Provocateur)의 주장과 같이 특정 정권의 정치적 성공이나 특정 정치인의 권력 획득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기독교적 정치윤리는 분명한 신학적 기반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해야 하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정치가 현실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출발점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는 극단적 포퓰리즘으로 인한 정치적 양극화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극단적 포퓰리즘과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지향과 노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것은 결국 왜곡된 정치적 주장과 건강한 정책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 의식의 문제이며, 이를 위해 다음의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부추기는 정책들을 거부하고 사회적 약자를 사회적 적(敵)으로 몰아가려는 왜곡된 정치적 행위를 분별해야 한다.

 

극단적 포퓰리즘은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부추김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 하며, 이를 위해 사회적 약자를 가상의 ‘적’으로 규정하여 사회·정치적 문제의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편’ 혹은 ‘자기 진영’을 결집하려고 의도적으로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도구로 삼는 것이다. 물론 현실 정치에서 ‘편’이나 ‘진영’을 무시할 수는 없으며, 이를 부정하는 이상적인 정치는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자기편의 결집이 반드시 차별과 혐오를 공공연하게 증폭시키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비극’과 같은 20세기의 불행한 역사를 통해 차별과 혐오의 정치가 가져올 비극적인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한국교회는 차별과 혐오의 정치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한 계명(막 12:33)으로 여기며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온유함”(딛 3:2)은 차별과 혐오를 통해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사회적 문제이자 왜곡된 정치 도구라고 비판하는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교회가 용납한다면 교회는 정치적 영역에서 “소금과 빛”(마 5:13~16)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부추기는 정책들을 거부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구화하는 정치적 행위를 분별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극우 세력에 의한 교회의 정치 도구화를 비판하고 이를 부추기는 정치적 행위를 분별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기독교 극우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명목상으로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내세우고 있지만, 교회를 과잉 대표하고 있는 근본주의 교회는 실질적으로 기독교 극우 세력과 같은 정치적 극단주의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근본주의와 극우 이념은 내적 기제의 동일성으로 인해 쉽게 결합한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 내 기독교 극우 세력은 교회를 정치적 도구로 쉽게 남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지난 총선과 대선 과정에서 근본주의적인 대형 교회들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해 불법 선거 운동에 나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교회는 몰락의 위기에 서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일시적인 퇴행에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지만, 근본주의가 과잉 대표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문제에 대한 분별력은 더욱 뒤처져 있다. 많은 교회가 여전히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며 상당수의 목회자는 전근대적 가치관 속에서 정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정치 도구화를 바라만 본다면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4)로 인해 교회의 극우화는 심화할 것이고 포퓰리즘 정책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교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막을 힘도 가질 수 없으며, 결국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마 5:13).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지금이라도 왜곡된 정치 행위를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양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1)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하나세정치신학연구소 소장.

2) Jan-Werner Müller, Was ist Populismus (Frankfurt a. M.; Suhrkamp Verlag, 2016), 14.

3) Jürgen Moltmann, Ethik der Hoffnung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Haus, 2010), 53-57.

4) 주변의 다수가 수용하는 것을 비판 없이 따르게 되는 현상(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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