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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직접적인 지시나 평가보다 비유를 사용하셨다. 씨를 뿌리는 사람,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그저 일상의 장면들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 인물과 자신을 겹쳐 보게 된다. (본문 중)
김지은1)
어느 방송에 출연한 한 의사 선생님의 간증을 보다가 한 장면에서 마음이 멈췄다. 그는 출퇴근길에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어떻게 우리에게 폭포수 같은 사랑을 부어 주셨는지 깨달으며, 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져 주고 계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밀려와 눈물이 났다고 했다.2)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난 뒤에 마음에 남았다는 감각 이야기가 오래 내 마음에 머물렀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함께 던지고 싶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거나 들었을 때, 우리 무의식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통독에서 큐티로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성경 통독을 중요한 신앙 훈련으로 강조해 왔다. 이후 흐름은 점차 매일의 큐티(QT)와 개인 성경 연구로 이동했다. 큐티를 통해 본문을 깊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는 방식은 신앙을 일상 속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변화는 자연스러웠고 실제로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통독이 주는 힘은 큐티로 완전히 대체되지는 않는다. 통독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힘이 있는데, 그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말을 거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큐티가 오늘의 삶을 조정하는 정밀한 도구라면, 통독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속에 배치하는 작업일 수 있다. 성경 전체가 만들어 내는 리듬과 반복, 실패와 회복의 구조가 말없이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심리학과 신앙 사이의 긴장
‘무의식’을 언급하면 신자들 가운데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나곤 한다. 어떤 사람은 신앙이 있지만 심리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타개할 방안으로서 큰 관심을 보인다. 또 다른 사람은 심리학이라는 도구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면 성령님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염려를 표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발달하면서 종교 영역에서도 이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늘 긴장이 있었다. 어떤 흐름에서는 심리학적 설명이 지나치게 지배하며 성령의 역사마저 심리 메커니즘 안에 가두는 듯한 결과가 나타났다. 반대로 심리학 자체를 세속적이거나 위험한 것으로 보고 배척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한다. 심리학 역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발견된 통찰이라면, 적절히 사용될 때 인간을 더 온전하게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성령의 역사를 자신이 상상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경험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양한 도움의 통로를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무의식은 설명보다 이야기에 반응한다
무의식은 단순히 억압된 감정의 저장고가 아니다. 뇌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고 기억을 엮으며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인생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암묵적인 답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통독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서사의 입력에 가깝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통과하는 동안, 뇌는 ‘내 삶은 이런 이야기 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지도를 그려 나간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간 후에 아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썼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아이는 『하늬, 히말라야를 넘다』라는 책을 스무 번 정도나 반복해서 읽었다. 히말라야 기러기 하늬가 극한의 고도를 넘어 생존 비행을 해내는 이야기였다. 의식적으로는 아이가 하늬의 좌절과 도움, 상처와 극복의 과정을 읽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 뒤처진 것 같은 두려움과 씨름하며 ‘두려워도 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기 안에 저장하고 있었다. 하늬가 쉼 없이 비행해 히말라야를 넘는 장면은, 의식적 수준의 설명 없이도 아이의 무의식에 용기를 심어 주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직접적인 지시나 평가보다 비유를 사용하셨다. 씨를 뿌리는 사람,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겉보기에는 그저 일상의 장면들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 인물과 자신을 겹쳐 보게 된다. “나는 어떤 땅인가”, “나는 지금 집을 떠난 아들인가, 남아 있는 형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남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결론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들의 마음에 이야기를 남기셨고, 그 이야기가 무의식 안에서 계속 작동하게 내버려 두셨다.
이것은 무의식에 말을 거는 방식이다. 비유는 의식의 방어선을 우회해 마음 깊은 곳에 질문을 남긴다. 사람은 즉시 바뀌지 않지만,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무의식에서 계속 일하게 된다.
정신과 진료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스스로 도움을 구하러 온 사람이라도, “당신 문제는 이것이고 이렇게 하라”고 문제를 정면으로 지목하는 순간 마음 빨리 닫힌다. 저항과 방어가 먼저 올라온다. 그러나 다른 길이 있다. 겉으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는 책이나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내담자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그 이야기와 연결해 말하기 시작한다. 변화는 지시가 아니라 자기 발견의 순간에 시작된다. 예수님의 비유와 이런 임상 장면은 같은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 사람은 설명보다 이야기로, 명령보다 서사로 변화한다.
통독은 하나의 거대한 비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 통독은 예수님의 비유를 확장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통독은 개별 본문을 분석하라는 요청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하나의 큰 이야기로 끝까지 통과하라는 초대이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다 보면, 인간은 타락했고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갈 때 구원이 열렸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넌 뒤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잘하고 싶지만 반복해서 실패하는 긴장이 이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고, 실제로 오셔서 우리를 구해 주셨다. 그 이후에도 성령을 힘입어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는 끝까지 버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너와 나만이 아는 네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신다. 마지막 장면에서 웅장하게 등장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은 그 기초가 보석으로 되어 있고 문은 진주로 되어 있다(이 장면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름다운 보석을 좋아하지만 살 수는 없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다른 설명 없이도 무의식에 새겨진다.
통독을 마치고 나면 특정한 구절이 또렷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리스도인으로서 고군분투하는 삶 전체, 그리고 결국에는 승리로 귀결되는 소망이 마음 깊은 곳에 남는다.
왜 성경은 이야기일까?
C. S. 루이스는 『시편 사색』에서 모호함이 많은 문학과 시로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때로 나는 창세기는 왜 정밀한 과학책으로 주어지지 않고 시와 이야기로 주어졌는지, 신약 서신서들은 왜 조직신학 교과서가 아니라 편지로 주어졌는지 답답함을 느끼곤 했었다. 심리학이라는 제한된 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면서, 어쩌면 하나님은 인간을 설명으로 설득하기보다, 이야기로 변화되도록 의도하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성경 통독에 대한 간증을 들은 후, 나에게 몇 년간 정체되어 있던 성경 통독을 다시 시도하게 되었다. 무의식을 말씀으로 빚어가는 이 과정에 많은 분들을 초청하고 싶다.
1) 이화여자대학교 뇌‧인지과학부 교수, 신경정신과 전문의.
2) “평생을 추구했던 ‘탁월함’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 황진희 성형외과 전문의”, 「새롭게 하소서 CBS」. 2025. 4. 2, 39:10–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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