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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로서의 외국인’이라는 시선은 무엇보다 비자 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뚜안은 미등록 체류자가 아니었다. 유학생 비자로 입국해 대학을 졸업했고, 한국어에 능통한 구직 비자(D-10)를 가진 합법 체류자였다. 그러나 D-10 구직 비자로 취업할 수 있는 문은 좁았다. 전공과 직종이 일치해야만 취업 비자(E-7)를 내주는데, 취업 전 대기 기간에 생계를 위해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할 수 있는 비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직된 비자 정책 때문에 결국 많은 유학생들은 “살기 위해” 취업 현장에서 미등록 상태로 내몰린다. (본문 중)

 

김세진(변호사, 법무법인 에셀)

 

“너무 무섭다.” “숨쉬기 힘들다.” “죽을 것 같다.”

 

2025년 10월 28일, 대구 성서 공단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25세 베트남 여성 뚜안이 동료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다. 그녀는 출입국 단속을 피해 3시간 넘게 숨어 있다가 3층 높이에서 추락해 숨졌다. 그녀의 아버지 부반숭은 “한국은 꿈의 나라였고, 딸은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라고 말했다. 뚜안은 그 꿈을 이루고 싶어 단속을 피하다가 결국 사망하였다.

 

뚜안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이주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구조적 폭력의 결과다. 그 구조의 핵심에는 외국인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도구’로 취급하는 정부의 외국인 정책 기조가 자리 잡고 있다.

 

외국인의 정주를 막는 순환 체류 비자 정책

 

‘도구로서의 외국인’이라는 시선은 무엇보다 비자 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뚜안은 미등록 체류자가 아니었다. 유학생 비자로 입국해 대학을 졸업했고, 한국어에 능통한 구직 비자(D-10)를 가진 합법 체류자였다. 그러나 D-10 구직 비자로 취업할 수 있는 문은 좁았다. 전공과 직종이 일치해야만 취업 비자(E-7)를 내주는데, 취업 전 대기 기간에 생계를 위해 공장 같은 곳에서 일할 수 있는 비자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직된 비자 정책 때문에 결국 많은 유학생들은 “살기 위해” 취업 현장에서 미등록 상태로 내몰린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데 한국 사회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높은 수요가 존재한다. 그러나 정부가 허용하는 합법적인 취업 비자 수는 그 수요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젊은 노동력은 끊임없이 수입하되, 그들이 한국 사회에 합법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정주(定住)는 조직적으로 차단한다. E-9 비자 관련 영주권 신청 요건인 5년에 못 미치는 4년 10개월이라는 체류 기간 설계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노동력’만 수입하고 ‘사람’은 정착시키지 않겠다는 순환 체류 정책의 실체이다. 정주할 권리가 없는 ‘이방인’에게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옹호할 법적·사회적 힘이 없다.

 

이러한 경직된 비자 정책 구조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제도적 착취와 인권 침해를 필연적으로 야기한다.

 

강제 단속의 정치학

 

정주를 막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내보내는 정책’을 동반한다. 강제 단속은 그 핵심 수단이다.

 

정부는 미등록 체류자 감축을 목표로 강제 단속을 지속해 왔다. 그 과정에서 추락, 사망, 중상 사고가 반복됐다. 그러나 미등록 체류는 형사 범죄가 아니라 행정 위반이다. 그럼에도 단속 현장은 범죄자 연행처럼 연출된다. 이러한 연출은 이주 노동자에게는 공포를, 사회에는 혐오와 정당화를 동시에 생산한다.

 

뚜안 사건의 단속 책임자인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장은 2025년 마지막 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뚜안 씨의 유족을 만나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자리에서 단속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개인에게는 사과하지만, 구조에는 책임지지 않는 태도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 태도는 정부가 ‘불법 체류’라는 표현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시민단체들은 오래전부터 이 용어가 외국인을 범죄자로 낙인찍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제 기준에 맞게 ‘미등록 체류’라는 표현으로 바꿀 것을 정부에 반복해서 제안해 왔다. 이는 단순한 언어 순화 요구가 아니라, 정책과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는 명확하다. ‘불법’이라는 낙인이 있어야 단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법 체류자’라는 표현은 외국인을 마치 범죄자와 동일 선상에 놓이게 만든다. 그렇게 인식되어야 체포와 구금, 강제 퇴거가 ‘질서 유지를 위한 정당한 조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단속과 구금을 정당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언어 장치가 된다.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환대의 윤리

 

결국 ‘불법 체류’, ‘강제 단속’은 단순한 용어나 제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낯선 이에 대한 시민들의 감정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하는 정치의 문제다. 낯선 이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고, 호기심과 환대의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는 개인의 성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정치와 제도가 그 방향을 만든다. 국가가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낯선 이는 위협이 되기도 하고, 이웃이 되기도 한다.

 

정부가 ‘불법 체류’라는 용어를 고집하고 외국인들을 형사 범죄자처럼 단속함으로써, 그 결과 외국인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아니라, 배제의 대상,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낯섦에 대한 호기심이나 연대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두려움과 혐오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가 만들어낸 인식의 방향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언어와 프레임이 기독교인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성경은 반복해서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말한다(출 22:21; 레 19:33-34; 신 10:18-19).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는 기억을 상기시키며, 외국인을 환대하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혈연이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도움이 필요한 자가 곧 ‘이웃’임을 분명히 하셨다. 외국인을 이웃의 범주에서 배제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외국인 혐오의 언어를 사용한다. 외국인을 위험한 존재로 묘사하고,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정치적 담론이 반복될수록, 신앙의 명령은 추상적인 이상으로 밀려난다. ‘나그네를 환대하라’는 성경 말씀보다, ‘질서’와 ‘단속’이라는 구호가 더 현실적인 언어처럼 들리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환대는 조건부 호의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다. 정치가 외국인을 이웃이 아닌 것처럼 규정하려 할 때, 그 흐름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질문해야 한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며 ‘외국인’을 제외하는 순간, 우리는 신앙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뚜안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뚜안은 마지막 순간 “무섭다”라고 말했다. 그 공포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다. 뚜안의 아버지는 딸의 죽음 이후 “이것이 뚜안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뚜안의 죽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낯선 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숨어 있다가 죽게 만드는 사회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존엄하게 살고 일할 수 있는 사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정부의 개인에 대한 사과나 규칙 개정 정도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가 ‘외국인도 사람’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외국인 정책을 세워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시민과 교회는 국가가 사용하는 용어, 이주민을 다루는 제도 전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하고, 이웃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 뚜안이 남긴 숙제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그 답을 찾는 것이 그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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