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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선언하신 것도, 평화를 단순한 소극적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능동적 소명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유산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국제 분쟁과 파병 같은 구체적 현안 앞에서 피상적 찬반을 넘어선 깊이 있는 윤리적 분별을 하도록 요청합니다. (본문 중)
(숭실대 교수, 기독교윤리학)
기독교 평화 윤리
전쟁과 분쟁의 소식이 일상이 된 시대에, 평화라는 말은 오히려 낯설고 추상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평화(샬롬)는 결코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속한 가치였습니다. 구약의 샬롬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온전함의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선언하신 것도, 평화를 단순한 소극적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능동적 소명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유산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국제 분쟁과 파병 같은 구체적 현안 앞에서 피상적 찬반을 넘어선 깊이 있는 윤리적 분별을 하도록 요청합니다.

ⓒUnsplash
평화 구축과 비폭력 윤리의 기준
군사적 갈등이나 분쟁 상황 속에서 기독교 평화 윤리가 지향하는 본질적 가치와 성찰의 기준을 조명하기 위해, 세 사상가의 통찰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갈퉁(Johan Galtung, 1930-2024)의 평화 윤리는 평화를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로 구분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소극적 평화가 단지 직접적 폭력(전쟁, 살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적극적 평화는 빈곤·억압·차별과 같은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까지 해소되어 정의와 평등이 실현된 상태를 뜻합니다. 갈퉁에게 진정한 평화란, 눈에 보이는 폭력의 부재가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에 내재한 불의와 착취가 제거된 상태입니다. 이 관점은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지역 분쟁을 바라볼 때, 단순히 “무력 충돌이 발생했는가”를 넘어 “이 지역의 자원·경제적 불균형, 강대국 패권 경쟁, 역사적 적대관계라는 구조적 폭력이 근본 원인은 아닌가”를 함께 질문하게 만듭니다. 파병의 정당성 역시 눈앞의 안전 확보뿐 아니라 그 지역의 구조적 평화 구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타락한 세상 가운데 완전한 평화(pax perfecta)는 종말론적으로만 완성되지만, 그 이전에도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평화’(pax terrena)를 추구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질서 회복과 폭력의 억제를 위해 무력행사가 불가피해 보이는 순간에도, 그것은 결코 자체로서 선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이웃 사랑에 종속된 비극적 선택이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에서 출발한 기독교 정당 전쟁(Just War) 전통은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서 정당한 권위, 올바른 의도, 최후 수단성, 비례성, 민간인 구별 등의 엄격한 윤리적 제약을 요구합니다. 이는 파병을 단순한 국익이나 세력 균형의 계산이 아니라, “이것이 참으로 무고한 이웃(자국민과 현지 민간인 모두)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사랑의 책무인가”라는 근원적 성찰로 이끕니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他者) 윤리는 여기에 또 다른 결정적 층위를 더합니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얼굴’(visage)로 마주하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에서 시작됩니다. 전쟁과 국가 안보의 논리는 흔히 타자를 ‘적’ 혹은 추상적 통계로 환원시키지만, 레비나스는 그 어떤 정치적·전략적 논리도 구체적 개인의 얼굴이 요청하는 책임을 소거할 수 없다고 역설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호르무즈 파병 논의는 추상적인 국익이나 동맹 논리로만 환원될 수 없으며, 그 해역과 주변 지역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민간인·선원·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즉 구체적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와야 합니다. 레비나스적 통찰은 정당 전쟁론의 ‘비례성’과 ‘민간인 구별’의 원칙에 윤리적 깊이를 더해, 전쟁과 파병의 논의가 숫자와 전략을 넘어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책임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일깨웁니다.
호르무즈 파병 및 국제 분쟁 현안에 대한 적용
이러한 세 시각, 즉 갈퉁의 구조적 평화 개념, 아우구스티누스의 절제된 정당 전쟁 윤리,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책임 개념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은 호르무즈 파병과 같은 현안 앞에서 다음과 같이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갈퉁의 질문), 파병이 단기적 안전 확보에 그치지 않고 해당 지역의 구조적 긴장—자원 경쟁, 경제적 불균형, 패권 다툼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는지, 혹은 오히려 군사적 긴장을 격화시켜 구조적 폭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둘째(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 파병의 명분이 자국 선박과 국민의 안전 확보, 국제 해상 질서 유지라는 정당한 목적에 부합하는지, 외교적 해법이 충분히 소진되었는지, 그 성격이 전투 임무가 아니라 호송·경계와 같은 방어적 성격에 머무는지를 엄격히 검토해야 합니다.
셋째(레비나스의 질문), 군사 작전과 외교적 득실이라는 거대 담론 이면에 가려진 현지 민간인, 해역을 오가는 평범한 선원, 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야 합니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이 타자의 취약성과 고통에 응답해야 할 신앙인의 무한한 책임을 지워버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호르무즈 파병과 같은 현안 앞에서 기독교 평화 윤리가 제시하는 것은 손쉬운 찬반의 정답이 아니라, 구조적 정의(갈퉁)와 절제된 책임(아우구스티누스)과 타자에 대한 무한한 응답(레비나스)이라는 세 축을 함께 붙들고 끝까지 질문하고 분별하는 신앙적 태도 그 자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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