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안에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 안에 소망이 있다. 희망이 열린 문을 분주히 찾는 발걸음이라면, 소망은 닫힌 문을 힘껏 걷어차는 발걸음이다. 희망은 흔들리지만, 소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절망의 시대에는 희망이 아니라 소망이 절실하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하시는 하나님, 사라와 한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본문 중)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겸임교수)

 

지난 11월 11일은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었다. 유럽 시민들은 언제나 그렇듯 존 맥크래의 시 ‘플랜더즈 들판에서’를 읊조리며 가슴에 양귀비를 달았다. 돌아오지 않는 전사자들을 영원히 기다리는 꽃이다. 11월은 하루로 치면 신약성경의 포도원 품꾼이 종일 기다렸던 오후 5시에 해당한다. 그 시간이 되도록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늦가을이 되면 인간의 실존 자체가 길고 긴 어떤 ‘기다림’이었음을 실감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자크 엘륄은 희망(espoir)과 소망(esperance)을 구분했다. 희망이란 가능한 것의 카드놀이 같다고 그는 말한다. 뭔가 데이터와 근거가 있을 때 사람은 희망을 품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망은 좋은 것이긴 하나 풀처럼 마르기 쉽다. 깜박이는 호롱불과 같다. 희망고문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아직 오지 않은 대상을 기다리는 희망은 때론 슬픈 비극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1차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 ‘애수’가 그렇다. 2차대전이 시작된 1939년 가을 안개 자욱한 런던 워털루 다리에 한 대의 지프가 멎는다. 오십이 다 된 독신 남자가 조용히 내려 추억에 젖는다. 1차대전의 소용돌이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던 곳도, 그녀가 죄책감에 못 이겨 생을 마감한 곳도 워털루 다리였다. 남자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포자기한 채 거리의 여자로 전락했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남자와 조우했지만, 여자는 기다리지 못했다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세월은 흐르고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녀를 회상하는 장면은 실현되지 못할 희망의 숙명을 잘 보여준다.

 

영화 애수(Waterloo Bridge) 중.

 

누구나 기다릴 수는 있다.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은 어렵다. 희망은 누구나 갖지만, 소망을 갖기란 어렵다.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기다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리긴 했는지 몰라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기다림을 관두고 만 것이다. 그런 기다림을 성경은 기다림이라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다림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소망이다. 하나님은 잠시 기다렸던 희망의 사람 말고, 끝까지 기다린 소망의 사람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지시고 거대한 바위에 단단히 서게 하신다.

독일 신학자 폴 틸리히는 기다림이 ‘갖고 있지 않음’과 동시에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희망을 품고 기다리면 갖고 있지 않음으로 마감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망을 갖고 기다리면 갖고 있음으로 완결될 것이다. 희망으로 ‘갖지 못함’을 소망으로 갖게 되고, 희망으로 ‘알지 못함’을 소망으로 알게 되고, 희망으로 ‘붙잡지 못함’을 소망으로 붙잡게 된다. 사람 안에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 안에 소망이 있다. 희망이 열린 문을 분주히 찾는 발걸음이라면, 소망은 닫힌 문을 힘껏 걷어차는 발걸음이다. 희망은 흔들리지만, 소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절망의 시대에는 희망이 아니라 소망이 절실하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하시는 하나님, 사라와 한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Unsplash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곧 시작된다. 성전에서 평생 메시아를 기다린 시므온은 희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님을 기다린 대가는 무엇이었나. 파직, 불명예, 그리고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 역사상 미증유의 사건을 소망했다. 앞으로 우리의 일생 또한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기다리는가에 달려 있다. “이제는 종을 놓아주시는도다!” 시므온의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 기도는 소망으로 살아낸 사람만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모래 같은 시간들을 희망하며 숨 가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영원을 소망하는 바위 같은 고백의 기도를 우리는 지금 드리고 있는가.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누가복음 2장 26∼27절)

본 글은 <국민일보 바이블시론>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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