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한옥에서 궁궐, 서원, 사원, 사찰, 고택 등에는 그 집의 이름인 현판(懸板)을 달고 기둥에는 경구를 쓴 주련(柱聯)을 붙였다. 한자로 쓴 현판은 대개 가로로 썼고, 주련은 세로로 썼다. 한자로 쓴 이 주련(柱聯)은 그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 보고 마음에 새기는 잠언이므로, 그 건물의 성격이나 사용자가 표방하는 사상을 드러내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회나 학교와 병원도 이 전통을 따라 현판과 주련을 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그 교회나 교단의 신학을 알 수 있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전통 한옥에서 궁궐, 서원, 사원, 사찰, 고택 등에는 그 집의 이름인 현판(懸板)을 달고 기둥에는 경구를 쓴 주련(柱聯)을 붙였다. 한자로 쓴 현판은 대개 가로로 썼고, 주련은 세로로 썼다. 한자로 쓴 이 주련(柱聯)은 그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 보고 마음에 새기는 잠언이므로, 그 건물의 성격이나 사용자가 표방하는 사상을 드러내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회나 학교와 병원도 이 전통을 따라 현판과 주련을 다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그 교회나 교단의 신학을 알 수 있다.

 

강화성공회 천주성전의 현판과 주련. 1901년 [엽서, 옥성득 소장]

1900년에 완공된 강화도 성공회 강화성전은 현판으로 “天主聖殿”을 걸었으며, [사진1]처럼 5개의 주련을 달았는데,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주련이다. 중앙에 있는 주련이 핵심 구절이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무시무종 선작형성 진주재

宣仁宣義聿昭拯濟大權衡 선인선의 율소증제 대권형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 천주 만유지진원

神化周流囿庶物同胞之樂 신화주류 유서물 동포지락

福音宣播啓衆民永生之方 복음선파 계중민 영생지방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과 끝이 없으나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으신 참 주재이시다.

인애와 정의를 선포 규명하고 구제하시니 공평한 큰 저울이다.

삼위일체 천주는 만물의 참 근원이시다.

성신의 감화가 두루 흘러 만물을 기르시니 동포의 즐거움이다.

복음을 전파하여 민중을 계몽하니 영생의 방도이다.

자연 만물과 역사와 삶을 통해 자연히 드러나는 창조, 자유, 평등, 기쁨, 영생의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첫 주련은 무시무종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은 보이는 형상과 보이지 않는 소리까지 태초에 먼저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참 주재를 말한다.

 

현 강화 천주성당과 주련의 모습(by Jjw, 위키백과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두 번째 주련의 聿昭(율소)는 스스로 밝히신다의 뜻으로 율소는 義(의)에 해당하며, 拯濟(증제)는 구원한다는 뜻으로 앞 구절의 仁에 연결된다. 큰 저울인大權衡(대권형)과 같이 공평케 하시는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양면으로 의로운 자를 구원하고 불의한 자를 벌하셔서 세상을 공평하게 하신다. 의로 심판하고 인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우주의 큰 저울과 같다.

세 번째 주련은 기독교의 핵심이므로 중앙에 두었다. ​Ad Fontes!(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 성전 안 제단 위에 “萬有眞原”(만유진원: 만물의 참 근원)의 편액을 달았다. 이 편액은 서울 정동의 첫 성당인 장림성당에도 걸었다. 장림성당은 회당 안 기둥에 주련을 걸었다. 성공회는 가톨릭과 함께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중국-일본-한국 성공회 순서로 채택하고 공용했다. 곧 한중일 삼국의 가톨릭과 성공회는 신 용어에서 모두 천주를 사용했다. 창조주 신앙은 19세기 선교에서 자연 신학을 이용해 동아시아인에게 기독교를 전도할 때 첫 접촉점이 되었다. 존 로스가 1881년 번역 출판한 첫 한글 개신교 문서인 『예수셩교문답』(성경문답)의 첫 질문도 “천지 만물이 어떻게 있는가?”였다. 당시 기독교 변증법의 제1장이 창조 신앙이었다. 성경도 창세기 1-2장 창조 선포로 시작하고, 창세기 구조와 유사한 바울의 로마서도 이방인을 향해 먼저 창조 신학을 이야기한다. 조상과 뿌리를 중시했던 중국인과 한국인에게 만물의 뿌리(근원)요 근본 조상인 하나님을 공경할 것을 전했다.

 

1890년 12월, 장림성당이 세워질 무렵의 정동 3번지 일대. 1892년 11월 27일에 이곳에 한옥건물로 성당을 신축하고 ‘장림성당’이라고 명명하였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갈무리)

 

네 번째 주련은 창조론에 이은 성령론으로, 성신의 감화가 사방에 물처럼 흘러 넘쳐 만물이 동산 안에 자라는 것이 동포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한국 교회가 성령의 감동을 흔히 감동적인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본래 뜻은 성령으로 감화(변화와 변혁: transformation)를 받아 감동(행동, 실천)하는 것이었다. 성령에 의해 만물이 변하고 자라며 인간의 지정의와 인격이 변한다. 신화(神化)는 성령의 불에 의해 일어나지만, 이 주련은 주류(周流)라고 하여 강화도에 어울리는 물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강화도에 밀려오는 한강수처럼, 혹은 쉼 없이 밀려오는 조류처럼 신류(神流)는 부지불식간에 만물과 인격과 관계를 감화 감동시킨다.

다섯 번째 주련의 신자의 ‘복음선파’는 두 번째 주련의 천주의 ‘선인선의’와 연결되면서 인과 의를 선포하고 펴는 것이 복음 전도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방(方)은 방책, 방법의 뜻이다. 대한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많은 방술(方術)이 등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국 계몽과 영생의 길은 어떤 신비한 영약이나 부적이나 산속의 피난처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고 선포했다.

이상 5개의 주련에서 강조되고 있지 않고 숨어 있는 것은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밝히지 않았다. 그것은 선교 초기 전도할 때 예수의 십자가 속죄 구원이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전면에 내세우면 배타적이 되어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주재요 만물의 근원되신 천주와 만물을 감화감동으로 기르시는 성신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근하면서 학교와 병원을 통한 인애를 실천하는 방법이 당시 성공회의 선교 정책이었다. 이는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도 택한 방법이지만, 두 교회는 학교와 병원 외에도 보다 직접적인 전도를 강조했다. 고교회 전통의 한국 성공회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직접 전도 방법보다 더 부드럽고 시간이 걸리는 토착화의 방법을 택했다. 숨어 있는 그리스도, 숨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25kg 밀가루 반죽 속에 숨겨진(ἔκρυψεν) 살아 있는 누룩 한 숟가락과 같다. 표피적 말이 아닌 심층적 삶(인과 의의 삶)으로 예수를 살아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변혁(신화)한다.

각 주련의 끝 글자만 보면 재, 형, 원, 낙, 방이다. 宰 누가 다스리는가? 衡 누가 평등케 하는가? 原 누가 근원인가? 樂 무엇이 즐거움인가? 方 무엇이 방도인가? 인생과 교회의 활로와 나라의 경영이 이 다섯 가지 물음과 답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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