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교인 A가 한 달 전부터 강박 증상에 시달리는데, 그 변화의 원인이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냐고 물으니 ‘2년 전에 이사하면서’라고 대답을 했다면, 이사는 하나의 요인이 되긴 하지만 유발인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럴 때에 목회자는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다. “이사는 2년 전이니까 지금 한 달간 힘들게 된 것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 수 있겠네요. 지금 이 힘든 시기 가까이에 어떤 다른 원인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상황의 변화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혼자 고민한 어떤 것일 수도 있지요.”(본문 중)

최의헌(목사, 연세로뎀정신과 원장)

 

지난 글에서 목회자가 교인에게 정신건강 진료를 권할 때에는 ‘안다’와 ‘모른다’의 메시지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정신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목회자가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안다’) 그것이 목회자 혼자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모른다’)을 안내할 때, 교인들은 보다 편안하게 진료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또한, 교인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면서 목회자가 얼마나 식견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질문이, “언제부터 그런 문제가 생겼는가?”라고 묻는 것이라고 했다. 이 질문을 통해 최근의 주요 시점을 전후로 어떤 초기 변화가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점의 상황을 ‘유발인자’(precipitating factor)라고 하는데 이번 글에서는 이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유발인자는 촉발인자라고도 하며 병을 표출시키는 요소를 말한다. 병이 표출되게 하는 데 일등공신이지만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있는데, 이는 보다 근원적인 요인이며 ‘취약인자’(predisposing factor)라고 부른다. 유발인자와 취약인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병이 일어나려면 유발인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병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는 취약인자가 결정한다. 탈모나 간염이나 암의 경우 집안 내력이라고 말하는 취약성이 있는데, 정신질환에도 그러한 취약성이 있다. 이 취약성의 일부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게 되는 것이지만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성장하면서 형성된다. 사람들이 옷이나 치장을 통해 자기 약점을 가리는 것처럼, 취약성은 노출되지 않고 덮여 있다. 이를 가리켜 ‘방어’(defense)라고 한다. 어느 순간에 그 방어가 해제되고 문제가 드러나는 상황이 생기는데, 방어를 해제시키는 것이 바로 유발인자이다. 취약인자는 만 7세 이전에 형성된다. 반면 유발인자는 증상 시작에서 대부분 6개월 이내에 존재한다. 취약인자, 유발인자, 증상의 기승전결을 확인하는 작업을 가리켜 사례개념화(case formulation)라고 부른다. 사례개념화를 잘할수록 전문성이 높아진다.

지금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 될 만한 일이 언제부터 있었냐고 물을 때, 대답이 1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은 정확한 대답이 아니거나 그만큼 문제가 만성적이라는 뜻이다. 만성적인 것이 아니라면, 1년 이내의 다른 변동 시점을 다시 살펴보도록 안내하는 것이 좋다. 가령 교인 A가 한 달 전부터 강박 증상에 시달리는데, 그 변화의 원인이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냐고 물으니 ‘2년 전에 이사하면서’라고 대답을 했다면, 이사는 하나의 요인이 되긴 하지만 유발인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럴 때에 목회자는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다. “이사는 2년 전이니까 지금 한 달간 힘들게 된 것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 수 있겠네요. 지금 이 힘든 시기 가까이에 어떤 다른 원인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상황의 변화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혼자 고민한 어떤 것일 수도 있지요.” 다행히 A는 이사 이후에 있었던 다른 요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사 후 교회의 소속 구역이 바뀌면서 만나게 된 새로운 구역장은 기존 구역장과 달리 성경 읽기와 활동을 엄격히 체크하고 진척을 요구함으로써 다소 부담을 주었다. 3개월 전에는 구역장이 개인 사정으로 구역장 일을 내려놓는 일이 있었다가 한 달 후에 사정이 나아져서 계속 구역장 일을 맡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구역장은 구역 관리에 더 힘을 쏟았다. 그런데 A는 이 시기에 오히려 참여가 더 저조해졌고 구역장으로부터 약간의 질책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후로 불안이 심해지고 강박 증상이 나타났다.

이 경우 유발요인은 구역장의 상황 변화와 그의 지적이다. A의 속마음을 좀 더 표현하게 하고 증상이 구체화되는 원인을 분명히 검토하기 위해 목회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질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듣고 보니, 구역장님이 사정이 생겨 구역 일을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수 있겠네요. 그런데 막상 구역장님이 다시 구역을 맡게 되었다고 들었을 때 어떠셨어요?”, “구역장님이 계속 구역을 맡게 된 후 오히려 참여가 저조해진 것은, 구역장님이 더 열의를 보인 점에 대한 일종의 부담 반응 혹은 거부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구역장의 꾸중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그 마음이 강박 증상을 나타내는 데에 얼마나 작용했을 거라고 보세요?” 등을 물을 수 있다. 질문이 정교해질수록 보다 전문적인 상담이 되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A가 2년 전부터라고 말한 것은, 그때부터 새로운 구역장과의 관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원인으로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원인이라면 증상은 2년 전 어느 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A는 구역장이 바뀌면 이제 통제권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무의식적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구역장이 돌아와 더 강한 통제를 하는 바람에 그 기대가 손상되었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무의식적인 절망으로 인해 증상이 발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강박은 통제와 주도권 싸움, 완벽주의적 갈망이 어우러져 형성되는 증상이다.

 

 

A에게 증상이 생긴 것은 유발인자인 구역장과의 관계가 작용한 것이지만, 우울이나 다른 문제가 아닌 강박 증상으로 발현된 것은 취약인자 때문이며, 취약인자는 만 7세까지의 성장 과정에 숨어 있을 것이다. 책에 나오는 취약성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신증이나 중독과 같은 중대한 질환은 취약인자가 만 0~1세 사이에 형성된 것이고, 우울증, 강박증, 식이장애, 성격장애와 같은 질환은 취약인자가 만 1~3세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신경증이라고 부르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태의 불안, 신체화, 갈등은 취약인자가 만 3~5세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취약인자를 파악하는 것은 복잡한 작업이라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목회자로서는 현재 발생한 문제와 그 문제 가까이에 있는 유발인자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부분이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 비교적 쉽게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유발인자로 취약인자를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취약인자와 유발인자는 자물쇠와 열쇠처럼 서로 짝이 맞기 때문이다. 개인의 취약인자는 잠긴 자물쇠처럼 방어에 의해 덮여 있는데 취약성과 일치하는 유발인자가 나타나면 자물쇠를 해제하여 문제가 발현된다. 그러므로 유발인자와 개념상 유사한 경험이 어린 시절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A의 성장 배경을 살펴보니 불안강박이 심한 어머니의 훈육 방식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구역장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통제와 주도권의 갈등과 개념상 일치한다.

내담자인 교인과 대화하면서 면담을 통해 파악한 결과만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질문의 의도와 그의 배경이 되는 개념을 설명해 주고 가능성 있는 취약인자를 추정하는 과정까지 하나하나 내담자와 공유한다면, 그 교인은 스스로를 이해하는 능력이 커지고 목회자가 앞으로 적절한 도움을 주며 안내할 것이라는 신뢰와 기대감을 갖게 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몇 가지 병리적인 증상을 묻는 질문과 정신과 진료를 의뢰할 때 유념할 점을 안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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