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복과 사랑을 외치면서 성장했으나, 죄와 정의는 외면했기에 잠깐 성장 후 쇠퇴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부, 건강, 복, 사랑의 번영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게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 욕망인 돈에 대한 질문이다. 곧 ‘예수를 믿으면 복 받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는가?’(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한국 개신교가 한국 사회를 향해 설교한 주된 메시지는, 1950년대까지는 “예수 천당”이었다.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로 바뀌었다. 영적 구원, 육체적 건강, 물질적 부라는 3박자 구원론이 유행했다. 살 만하게 된 1990년대부터는 부담스러운 예수는 사라지고 부성의 하나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호가 압축 성장 때 불법을 저지른 중산층 교인들을 위로하자 대형교회가 성장했다. 지난 두 세대 동안 한국 교회는 복과 사랑을 외치면서 성장했으나, 죄와 정의는 외면했기에 잠깐 성장 후 쇠퇴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부, 건강, 복, 사랑의 번영 신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게 던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 욕망인 돈에 대한 질문이다. 곧 ‘예수를 믿으면 복 받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는가?’

 

무종교 국가가 잘 사는가, 기독교 국가가 잘 사는가?

한국 교회에 유행하는 담론의 하나가 기독교 국가는 잘 산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이 문제로 이런저런 토론이 있었다. 먼저 흔히 하는 질문들을 정리해 보자.

 

  • 특정 종교와 한 국가의 부는 같이 가는가?
  • 기독교 때문에 영국과 미국이 부자가 되었는가?
  • 현재 남부 유럽의 가톨릭 국가와 정교회 국가는 빚이 많고 경제는 침체되어 있는데, 대체로 북부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경제 사정이 좋다. 이것이 종교 때문인가?
  • 그것은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테제를 지지하는가?
  • 1970년대 이후 일본, 남한, 싱가포르, 대만, 홍콩, 그리고 90년대 이후 중국이 부유하게 되자 ‘유교 자본주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이 나라들은 유교 때문에 자본주의가 성공했는가?

 

흔히 사용하는 ‘부자 나라 논증’이라는 게 있다. 간단히 말하면, 선교할 때 기독교 국가가 더 잘 살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으라고 변증하는 논리이다. 선교에서 사용하는 계몽론, 문명론이다.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 선교사들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빈국에 가서 이 논증을 들이대며, “한국을 봐라, 한국 기독교를 믿고 한국 경제처럼, 한국 교회처럼 성장하라”라고 전도했다. 과거 잘못된 영미 선교사들의 영적 제국주의를 추종하여 한국식 기독교를 이식하려고 한 승리주의 선교 모델의 우를 범했다. 비슷한 논리로 한국 안에서도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전도했는데, 70-80년대 압축 성장을 할 때 통했던 “3박자 구원”론이었다. 강남에서는 아직도 통하는지 몰라도,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는 안 통하는 논증이다.

 

‘삼박자 구원’론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개척자인 조용기 목사의 신학체계이다. ①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회개하면, ②구원에 이르고, ③영적·물질적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19세기 후반의 논증

19세기 후반의 논리는 위와 조금 달랐다. 19세기 후반 영미 개신교 선교사들은 이미 가톨릭 선교가 이루어진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개신교를 선전하기 위해서, 가톨릭 국가(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는 한물간 2등 국가이고, 이제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미국이 (또는, 캐나다, 화란,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등이) 1등 문명국가이므로, 가톨릭을 떠나고, 다른 종교를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하라고 설득했다. ‘기독교 문명’ 담론이었다.

한국 개신교 선교도 이 문명론으로 학교와 병원을 짓고 문서 선교로 계몽에 나섰다. 서구 기독교 국가의 과학과 기술을 통해 근대화, 문명화, 서구화, 자본주의화를 이루라는 논리였다. 한국도 이 담론을 따라 ‘프랑스 천주교’ 대신 ‘미국 개신교’가 성장했고,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제국의 기독교로 대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미국 개신교가 주류가 되었다.

​따라서 ‘부자 나라 논증’은 (1)19세기 후반부터 선교에 사용된 논리였고, (2)개신교 국가 >가톨릭 국가 >정교회 국가> 타종교 국가 순서로 잘 산다는 논리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국가라고 일반화하면 절반만 맞는 말이다.

​최근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 남부 국가들이 국가 부도 위기가 올 정도로 경제가 침체되자 이 개신교-가톨릭 국가 비교가 다시 힘을 얻었다. 다음을 보라. 가디언(The Guardian)에서 소개하는 한 연구는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수많은 요소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주 변수는 아니지만, 하나의 변수는 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한다.[1] 그 정도가 좋겠다.

 

막스 베버의 테제는 신화

  1905년에 출판된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중국이나 동유럽이 아닌 서유럽의 개신교 국가에서 왜 자본주의가 먼저 발생했으며, 왜 부유한 자본가들이 검소하게 생활하는가를 질문했다. 베버는 그 원인을 부의 축척에 대한 개신교 신학, 곧 칼뱅주의의 예정론에서 찾고, 개신교에 세속적 금욕주의(secular asceticism) 윤리로 검소하게 살고 저축한 돈을 투자해서 더 많은 부를 쌓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경제 윤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불렀다.

 

(좌)막스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독일어 초판 표지. (우)한국어 번역본. 본 도서는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 도서 선정>에서 사회과학분야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출처: wikipeia 갈무리)

 

​베버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선택적 친화성(elective affinities)이었다. 이 말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소설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 영문 제목은 Elective Affinities)(1809)에서 빌린 것인데 친화성은 본래 화학 물질 간의 끌리는 힘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베버는 이를 사회학적 개념으로 이용했는데,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양자 간에 선택적 친화성이 존재했기에 칼뱅주의 서구 유럽국가에서 자본주의가 먼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베버에 따르면, 칼뱅주의는 소명인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신자들을 격려했는데, 직업에서의 성공과 부의 축적을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표지로 삼았다. 내적 믿음은 객관적 결과로 증명되어야 했다. 수도사적 금욕주의라는 1차원적 선행 대신 세속적 금욕주의로 삶의 다차원적 선행이 요구되었다. “시간이 돈”이므로 시간 낭비는 죄로 간주되었다. 눈에 보이는 부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가 되면서, 불변의 운명(영복의 구원이냐, 아니면 영벌의 심판이냐)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라졌다. 일상생활의 확신 속에서 합리성과 검소함과 경건을 결합한 ‘개신교 노동 윤리’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자본주의 정신이 되었다.

​종교적 동기(상부구조)가 경제(하부구조)를 변화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동력이라는 베버의 테제는 이후 사회학의 교과서적인 이론이 되었다. 청교도에 의해 미국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이나, 북한의 개신교 지역에 1910년대부터 자립적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상업과 공업 자본주의가 발전되었다는 설, 해방 이후 개신교 윤리를 가진 북한 출신 사업가들이 중대형 기업을 세웠다는 해석, 70-80년대 한국 자본주의 성장에 개신교인의 직업윤리가 기여했다는 주장은 베버의 테제를 적용한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들은 탄탄한 사료에 바탕을 둔 연구 결과는 아니다. 즉, 자본주의가 한국 교회를 성장하게 했고 대형 교회를 만들었지, 그 역이 아니다.

스타크(Rodney Stark, 2017)는[2] 베버의 테제는 이미 1909년부터 비판 받기 시작하여 사뮤엘슨(Kurt Samuelsson, 1957)에 의해[3] 최종적으로 배격되었다고 정리한다. 루터 개혁 이전에 가톨릭 도시들에서 이미 자본주의가 발흥하고 있었으며, 수도원들에서 토지 경영, 무역 경영, 현금 경제, 신용 제도, 일용 노동자 고용 등이 발생하고 있었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수도원에서 이미 검소한 생활과 부의 재투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루터는 유대인의 대금업을 부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재정 제도의 발전을 저해했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전통적으로 죄악시하던 이익과 이자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했다. 그 결과 수도원은 농업, 상업,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축척한 부로 은행업에 진출해 이자로 더 많은 부를 축척했다. 주교들은 수도원들과 로마 교황청의 은행이나 유럽 도처에 설치된 이탈리아 은행들의 지점에서 많은 돈을 빌려 성직을 매매하여 추기경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면벌부로 연결되는 부작용도 나타났지만, 13세기에 이미 자본주의의 발흥 요소인 이자, 재산권, 대부업 등에 대한 담론과 제도가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발흥에 하나의 변수는 될 수 있었겠지만 주요 요인은 아니었으며, 지역적 차이도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베버의 테제는 유행했고, 너도나도 그 책을 읽고 써먹었기 때문에, 지금도 개신교 윤리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게 가능한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그 논증은 강남의 중산층이 좋아할 수가 있지만, 검소하게 수도사처럼 사는 절제의 윤리를 실천하는 개신교인은 별로 없는 상황이니, 온전한 칼뱅주의 개신교 윤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게 유교 윤리에 바탕을 둔 중산층 윤리이요 자본주의 윤리인가?

 

유교 자본주의 담론의 허구성

1970년대 일본을 이어 동아시아의 4마리 용(또는 호랑이라고도 한다)인 남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가 잘 살게 되자 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은 그 성공 요인을 찾았으나 경제이론으로 설명이 잘 되지 않았다. 남미에서 1950-60년대 잘 살던 아르헨티나 등이 선진국 진입에 실패하자 그것을 종속이론[4]으로 설명했지만, 70년대 이후 동아시의 경제 성장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 모리시마 미츠오(森嶋通夫, 1978)는 忠, 孝, 信, 敬의 유교 사상에 기반을 둔 일본 교육의 영향으로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주장했다.[5] 베버 테제의 일본 버전으로, 양자 모두 종교 문화적 해석이었다.

유교 자본주의론은 칸(Herman Kahn, 1979)에 의해 미국에서도 유행했다.[6] 에이크먼(David Aikman, 1986)은 일본과 소룡 4개국이 유교 윤리와 자본주의를 결합한 동아시아 경제 모델을 만들어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가족주의(효), 사회적 안정과 질서(노사 협조), 건전한 노동 정신(근면), 가족과 국가를 위한 희생(충효), 교육 강조 등이 생산성 향상과 기업 성장 요소로 작동했다고 보았다.[7]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에이크먼이 20년 후 쓴 책에서는 중국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과 경제 성장을 보고는 개신교가 중국의 희망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8] 그때만 해도 중국은 유교를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가 들어서자(2008년 부주석, 2012년 주석) 사회 질서와 국가 주도 경제를 강조하면서 다시 유교를 불러들였다. 공자 센터가 전 세계에 세워지고 유교 붐이 일었다. 유교 자본주의론도 힘을 얻었다.

한국에서는 1995년부터 유교 자본주의론이 본격적으로 토론되었다. 그해 정치학회는 “유교와 자본주의”와 “유교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했다. 1995년 함재봉 등 보수적인 사회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전통과 현대>가 창간되고 유교와 자본주의 간의 관계를 논했다. 일본과 미국에서의 20년 가까운 논의를 정리하면서 한국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베버의 선택적 친화성 개념을 유교와 사회주의에 적용하여 양자 간에 더 친화성이 있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유교 자본주의 담론은 졸지에 사망했다. 1997년 재정 위기와 함께 IMF 관리를 받게 되면서, 유교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고 칭찬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이제 논객들은 유교 때문에 은행의 부패, 재벌의 재정 불투명성과 정실주의,[9] 관료의 무사안일주의 등 온갖 ‘한국병’이 창궐하고 그 결과 국가 부도사태가 났다고 외쳤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이고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의 이름으로 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양산된 것은 파트타임잡이었고 투잡도 모자라 스리잡으로 살아야 하는 청년들만 고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국민들이 금을 희사하고 2년 만에 재정 위기를 극복하자, 다시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처럼 ‘아시아 가치’(Asian Value)를 들고 나오면서 유교 윤리 때문에 아시아는 건재하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나왔다. 아시아적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 치장한 서구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사실 ‘동도서기론’[10] 당시부터 나온 이야기였다. 끌어오면 사용도 되고 오용도 되는 게 이론이다. ‘지록위마’[11]가 되기도 하고, ‘녹비에 가로왈’[12]도 되는 게 유교다.

​현재 중국은 중화주의의 부흥을 꿈꾸며 다시 유교에 불을 지피고 있다. 마르크스를 버리고 공자를 불러와서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자본주의는 성장시켜 보려고 하지만, 그게 잘 될 리가 없다. 아무튼 Confucianism is confusing(유교는 헷갈린다).

​한국에서는 이제 유교 자본주의를 말하는 논객은 별로 없다. 그러나 개신교 자본주의론은 아직도 건재하다. 중산층 교인과 목회자들이 그 낡은 담론을 50-60 레코드 판 돌리듯 재생하기 때문이다.

 

무종교 국가가 잘 산다는 주장에 관하여

2012년 전후부터 세계에서 부자 국가 1-20위를 뽑고 그 중 14개 국가에 무신론자가 가장 많다는 연구가 보도되기 시작했다.[13] 미국의 권위 있는 Pew Research Center도 2015년에 다음과 같이 미국을 제외한 부자 국가들의 경우 대개 인구에서 무신론자 비율이 높다고 인정했다.[14]

 

 

GDP와 국가의 종교성의 관계를 보여주는 지표. 부유한 국가일수록 종교성이 낮은 경향을 보이지만 미국은 예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성’은 사회학이 측정하는 수치로 표시되는 종교성이다. 타당한 면도 있지만, 종교성 수치가 낮다고 사람의 본성이 덜 종교적이거나 덜 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미국, 독일, 영국, 일본 등에 있는 무종교인들이 비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경우 무종교인이 많은 것으로 나오는데, 그때 ‘종교’라는 범주가 서양적 개념의 종교(사제, 경전, 사원을 가진 제도 종교)이기 때문이다. 다종교 정체성을 가진 한중일 동아시아인의 종교성을 서구적 개념으로 잡아낼 수 없다. 일본이 종교인 비율이 가장 낮게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조사 범주 자체가 의심스럽다. 그러므로 무신론자가 많으면 부자 국가가 된다는 논리 역시, 개신교인이 많으면 부자가 된다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한 가지 요소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고 일반화하는 오류가 있다. 현재 선진 국가들에서는 무종교인(religious none)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나라들이 점점 더 잘 살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글을 맺으며

한국 교회가 2010년대에 난맥상을 그리고 쇠퇴한 근본 원인의 하나는 번영 복음이다. 예수를 믿고 부자가 되고 권력과 명예와 건강을 누리자는 신앙에 교회가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 양심에 거리낄지라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힘을 추구했기 때문에 대위기에 처해있다. 예수를 따르는 한국 기독교는 다시 한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와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초대 교회 모습을 돌아보면서,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을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비우신 예수님의 삶을 성찰하면서 10년대를 정리하고 20년대 첫날을 맞이하면 좋겠다. 지난 10년간 예수께서 가신 길에서 많이 멀어진 한국교회가 돌아서서 가난의 길로 가기로 작정하는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빈다.


[1] “Protestant v Catholic: which countries are more successful?” https://www.theguardian.com/education/2011/oct/31/economics-religion-research

[2] Reformation Myths (2017).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손현선 옮김(헤르몬, 2018).

[3] Religion and Economic Action: the Protestant Ethic, the Rise of Capitalism, and the Abuses of Scholarship (1957).

[4] 세계 경제체제를 중심부와 주변부로 구분하고 주변부 국가들이 중심부 국가들에 종속되어 착취당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이론(편집자 주).

[5] “The Power of Confucian Capitalism”(1978).

[6] World Economic Development, 1979 and Beyond (1979).

[7] Pacific Rim: Area of Change, Area of Opportunity (1986).

[8] Jesus in Beijing (2006). 『베이징에 오신 예수』, 김미수 옮김(좋은씨앗, 2005).

[9] 사적인 정이나 관계에 이끌리는 태도(편집자 주)

[10] ‘동양의 사상은 그대로 지키되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이자’는 주장으로서 1880년대 초 개화기에 등장함(편집자 주).

[11]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한다.” 뻔히 아닌 것을 억지로 우기는 것(편집자 주).

[12] “사슴 가죽에 쓴 가로왈 자.” 가죽을 당기는 방향에 따라 가로왈(曰) 자도 되고 날일(日) 자도 된다(편집자 주).

[13] https://debatingchristianity.com/forum/viewtopic.php?t=20338

[14] “Wealthier Nations Less Religious; U.S. an Exception”(2015. 3. 12). http://www.pewresearch.org/fact-tank/2015/03/12/how-do-americans-stand-out-from-the-rest-of-the-world/ft_15-03-10_religiousgdpsc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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