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생각해 볼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다. 여기 나오는 두 도시는 프랑스 혁명기의 런던과 파리다. 프랑스 혁명을 초래한 악랄한 귀족들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느 후작 가문, 귀족의 폭압에 무너진 한 평민 가족,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의사 가족. 이 세 가족 구성원들의 과거와 현재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의 사건 한복판에서 서로 엮이면서 당대의 억압과 불의, 복수와 광기, 그 와중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빛나는 고결한 가치가 드러난다.(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음으로써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울 만큼 너무 좋은 소식이기에 ‘복음’이라 불린다. 그러나 복음의 깊이와 실체를 깨닫고 경험하기도 전에 올바른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근거로 제시하는 대속(代贖)의 교리는 공허하게 다가가기 십상이다. 몇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일전에 소개한 바 있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 『현명한 피』에 나오는 장면이다.

 

주인공 헤이즈는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동네 카니발에 갔다가 아버지와 동네 남자 어른들이 다른 볼거리에 비해 비싼 돈을 내고 들어가는 외떨어진 천막에 몰래 뒤따라 들어가 외설적인 장면을 보게 된다. 당황하여 집에 돌아온 헤이즈를 보고 뭔가 눈치를 챈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고 ‘뭘 봤느냐?’고 캐묻는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털어놓지 않고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은 널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셨다.” 헤이즈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난 부탁한 적 없는데.”

 

어머니는 아들의 기막힌 답변에 회초리질을 멈추고 한동안 아들을 바라보다 두고 온 물통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기독교인 어머니로서는 앞이 캄캄하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겠지만,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좀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 “난 부탁한 적 없는데.” 헤이즈의 이 반응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을 근거로 이런저런 당위를 요구하는 설교에 ‘시달려온’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이 장면을 염두에 두고 이번 달의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좌)찰스 디킨스의 원작 『두 도시 이야기』 초판. (중)『두 도시 이야기』 국내 번역본(최신), (우)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 포스터.

 

찰스, 갇히다

 

이번에 생각해 볼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다. 여기 나오는 두 도시는 프랑스 혁명기의 런던과 파리다. 프랑스 혁명을 초래한 악랄한 귀족들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느 후작 가문, 귀족의 폭압에 무너진 한 평민 가족,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의사 가족. 이 세 가족 구성원들의 과거와 현재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의 사건 한복판에서 서로 엮이면서 당대의 억압과 불의, 복수와 광기, 그 와중에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빛나는 고결한 가치가 드러난다.

 

의사인 마네트 박사는 프랑스 바스티유 감옥에서 18년을 억울하게 옥살이하고 그 과정에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가 된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한때 그와 거래하던 성실한 영국인 은행원 로리 씨의 도움을 받아 장성한 딸 루시를 만나고 런던으로 넘어와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회복한다. 5년 후 마네트 부녀는,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큰 위험에 처했던 프랑스 출신의 찰스 다네이를 위한 증인으로 나서 그의 석방을 돕는다. 찰스의 변호를 맡았던 스트라이버 변호사에게는 사건 분석과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는 뛰어난 조언자가 있었으니, 찰스와 얼굴이 많이 닮은 카턴이었다. 카턴은 한때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는 사람처럼 매일 술에 절어 살면서 스트라이버의 사건을 돕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찰스의 재판으로 루시 마네트를 알게 된 세 남자, 찰스, 스트라이버, 카턴 모두가 그녀에게 연정을 품지만, 그녀에게 ‘제대로 된’ 고백을 하고 그녀의 마음을 얻은 것은 찰스였다. 루시는 찰스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세월을 보낸다. 그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벌어져 많은 귀족들이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고 상당수는 런던으로 넘어온다. 안전한 런던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위험천만한 파리.

 

그런데 찰스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도움을 호소하는, 프랑스에서 온 재산 관리인의 절박한 호소가 담긴 편지를 받는다. 루시의 남편 찰스는 사실 프랑스 후작의 작위를 물려받을 귀족이었던 것이다. 고결한 성품의 그는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다 위험에 처한 관리인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넘어간다. 그리고 곧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만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던 귀족이라는 죄목이었다. 그는 고상한 동기와 선의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죄수가 된 것이다.

 

마네트 박사의 활약과 좌절

 

얼마 후 사정을 알게 된 마네트 부녀는 파리로 넘어온다. 딸의 위로와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았던, 그동안 딸에게 의존하여 생명을 공급받았다고 할 수 있는 마네트 박사가 이제 문제해결자로 나선다. 부당한 기성체제에서 오랜 세월 억울하게 고통당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혁명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권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의사로서의 능력 또한 그의 권위를 높여 주었다. 마네트 박사는 18년의 억울한 감옥 생활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 사위를 구해 내어 딸의 행복을 되찾아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그로 인해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힘이 넘쳤다.

 

오랜 노력과 지체, 기다림 끝에 과연 그가 장담한 대로 찰스는 감옥에서 풀려난다. 마네트 박사가 겪었던 고통은 그렇게 보상받는 듯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누군가의 고발로 찰스는 다시 투옥된다. 이번에는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다. 마네트 박사의 평판과 노력도 이제는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당당하고 꿋꿋하게 사위의 석방을 위해 애쓰던 그는 최후의 순간에 다시 무너져 내린다.

 

카턴의 등장

 

그렇게 막막해진 마네트 박사의 가족들 앞에 카턴이 나타난다. 변호사 친구에게 빌붙어 사는 술꾼 말이다. 카턴이라는 사람이 아주 독특하다. 그의 사랑은 기사도적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연모하는 여성을 위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봉사하지만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인물이다. 카턴은 루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며, 그 부분에서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카턴의 자기 인식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를 내팽개친 형편없는 술주정꾼에 자학 증세까지 있는 비참한 존재”다. 그런 그가 그녀를 자기 “영혼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한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그가, 루시와 마네트 박사, 그리고 루시가 가꾼 가정을 보고 죽은 줄만 알았던 옛 감정이 되살아났다고, 그녀를 통해 “새롭게 노력하자, 다시 시작하자, 게으름과 방탕을 털고 포기했던 싸움을 다시 시작하자”라고 다그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꿈에 불과했고 그 꿈을 실현할 힘이 그에게 없었지만, 그 꿈을 일깨워 준 루시에 대한 감사는 그대로 남았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희미한 그 무엇을 일깨워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는 이렇게 약속한다. “아가씨와 아가씨를 사랑하는 그분을 위해 저는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만약 제 경력으로 도움이 되어 드릴 일이 있거나 희생할 기회나 능력이 된다면 기꺼이 아가씨와 아가씨가 사랑하는 분을 위해 희생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와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카턴이 애초에 자신을 포기하고 희망을 저버렸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한편으로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그는 자신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선을 향한 추구와 갈망, 자신의 한심한 모습에 대한 자각, 이런 것들이 되살아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쁘고 벅찼다. 그리고 그것을 되살려준 소중한 대상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지키는 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카턴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찰스를 보며 자신이 말했던 희생의 기회를 발견한다. 그리고 비상한 머리를 동원하고 적절한 대상에게 협박을 일삼고, 협력할 사람과 치밀한 계획을 세우며 그 기회를 현실로 만들어 나간다. 마침내 찰스가 갇혀 있는 감방으로 들어간 그는 찰스와 닮은 얼굴을 활용해 찰스를 내보내고 사형수로 남는다.

 

부탁한 적 없는 호의

 

카턴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소설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찰스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전혀 손쓸 수 없는 무력한 위치에 있었다. 마네트 박사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와 능력,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사위를 구해 내려 했으나, 그 모든 영웅적 시도는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후작 가문의 씨를 말리려 드는 복수의 화신의 집요한 공격 앞에서 그의 모든 것은 무력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시도가 무위로 끝난 절망의 시점에 등장한 카턴은 찰스에게 말 그대로 자신의 생명을 내준다. 새롭게 살아갈 기회를 준다.

 

앞에서 소개한 『현명한 피』의 어린 헤이즈가 했던 대사를 떠올려 보자. 어머니가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기 위해 꺼내든 그 회심의 대사, “예수님이 널 위해 죽으셨어”에 대한 반박으로 등장한 그 대사 말이다. “난 부탁한 적 없는데.” 그런데 헤이즈의 그 대꾸는 그지없이 ‘맞는 말’이었다. 헤이즈는 예수님에게 자길 위해 죽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핵심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는 자를 위해, 그 사실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을 위해 죽으시지 않았는가. 『두 도시 이야기』의 카턴이 바로 그런 일을 했다. 어느 누구도 카턴에게 찰스 대신 죽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루시도, 마네트 박사도, 찰스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카턴은 누구도 부탁한 적이 없는 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토록 고귀하고 고결한 일이요, 참사랑에서 나온 희생이 될 수 있었다.

 

우리를 돌아봐도 부탁한 적이 없는 숱한 것들을 받고 산다. 태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던가. 언제 부모의 사랑을 부탁해서 받았나. 그냥 생명을 받았고, 사랑을 받았고, 보살핌을 받았다. 그런 게 어디 부탁한다고 주어지는 것들인가. 그렇게 염치없이 받기만 해서 오랜 기간 살아남았고 ‘부탁한 적도 없이 받은’ 수많은 것들이 쌓여 마침내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부탁한 적도 없이 받은 것들은 그런 의미에서 생존의 조건이었다. 혹시 우리는 평소에는 부탁한 적도 없이 주어지는 온갖 것들을 그냥 넙죽넙죽 받다가, 상황이 곤란해지거나 내 심기에 거슬리는 것, 하기 싫은 것이 나타나면 그때 비로소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는 건 아닐까.

 

『현명한 피』의 그 장면도 헤이즈의 일방적 승리로 그냥 마무리되지 않는다. 헤이즈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이대로는 안 되고 뭔가 상황을 바로잡을 조치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한다. 다음날, 그는 부흥회 때와 겨울에만 신는 신발에다 자갈과 돌을 집어넣고는 그 신발을 신고 1마일 정도 떨어진 냇가로 걸어간다. 고행을 선택한 것이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밖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길을 내가 언제 부탁한 적이 있느냐며 거절한 그에게 남은 것은 자기 안에서 길을 모색하는 것뿐이다.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그는 계속 그런 식으로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현명한 피』에 대한 좀 더 긴 논의는 앞서 실었던 연재 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다가 나온 선택들>을 참고하라). 그 길은 혹독하고 절망적이다. 부탁한 적도 없고 우리가 필요한 줄도 몰랐던 은혜만이 살길이라고,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헤이즈를 통해 오히려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루시와 마네트 박사, 그리고 누구보다 찰스는 분명 그렇다고 진심으로 동의할 것 같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뮤지컬로 각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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