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스메르자코프의 계획은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드미트리를 다 알지 못했고, 이반도 그가 아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알료사의 고군분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절묘하게 작용했다. 그는 절망에 빠진 드미트리에게 그의 무죄를 믿어 주는 한 사람이 되어 그를 “부활시킨다.” 그리하여 이후에 드미트리가 더 많은 난관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게 막아줄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욕망에 충실하고 사회적 관습, 평판 따위는 무시하는 짐승 같은 사람이다. 그는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 연적 관계다. 부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그루센카는 모호한 태도로 두 사람을 애태운다. 안 그래도 험악하던 부자지간은 경쟁 과정에서 원수지간이 되어버린다.

 

드미트리는 어릴 때 자신을 완전히 방치했고 자기에게 감시자를 붙이고 자신을 옭아매려고 계략까지 쓰는 아버지를 증오한다. 그는 욕정에 눈이 멀었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으며 폭력적이고 도무지 성질을 죽일 줄 모른다.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고, 술만 먹으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떠벌린다.

 

카라마조프 부자의 갈등은 마을 사람들이 다 안다. 사람들은 여기서 폭력과 범죄의 징후를 읽어 낸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은 좋은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말도 못 할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은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갈등을 증폭시키려 드는, 아니 아예 폭발시키려 드는 자였다. 또 하나는 그 갈등이 파국으로 끝나지 않도록 막으려는 자였다.

 

스메르자코프, 설계를 하다

 

아버지 표도르는 진작 그루센카를 집으로 초대했고, 집에 오면 주려고 돈까지 준비해 둔 상태다. 표도르는 집안에서 그루센카를 만날 생각에 잔뜩 몸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론 난폭한 큰아들이 무섭다. 그래서 문을 잠그고 방 안에 있으면서 오매불망 그루센카를 기다린다. 그리고 요리사 스메르자코프(표도르의 혼외 자식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다)에게 그루센카가 올 경우에 방문을 열어줄 신호를 알려 준다.

 

스메르자코프는 드미트리의 정보원이기도 하다. 표도르의 동향을 감시하고 그루센카가 아버지 집에 오면 바로 알려 주는 역할이다. 말하자면 이중 첩자인 것이다. 드미트리에게는 마침 아버지가 그루센카에게 주려고 챙겨놓은 3천 루블과 같은 액수의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구하지 못해 점점 더 필사적이 되어 간다. 이런 드미트리에게 스메르자코프는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다. 그루센카를 맞이하기 위해 표도르가 스메르자코프에게 알려준 신호 말이다. 표도르의 방으로 들어갈 열쇠를 건넨 셈이다.

 

이제 스메르자코프는 언제든 부자 상봉을 성사시킬 수 있게 되었다. 표도르에게 그루센카가 방문할 시간을 알려서 문을 열어줄 준비를 시키고, 드미트리에게는 같은 시간에 그루센카가 표도르의 방에 있을 것처럼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드미트리의 신호에 표도르는 문을 열어줄 테고, 격정과 질투에 불타는 가운데 이루어질 뜻밖의 상봉은 파국으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둘의 싸움을 말릴 사람, 아니 드미트리의 폭력을 가로막을 훼방꾼이 있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방해꾼이 없어야 했다.

 

셋째 아들 알료사는 수도원에 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안의 또 다른 하인인 그리고리 부부는 스메르자코프 자신이 적당히 관리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건 둘째 아들 이반이다. 이반이 협조를 할까? 스메르자코프는 이반과 이야기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무신론자 이반은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메르자코프가 늘 막연히 느껴온 생각을 완벽하게 정의해 준 철학의 소유자가 이반이었다.

 

스메르자코프가 볼 때 이반도 아버지 표도르를 경멸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표도르를 직접 처리할 사람은 이미 확보했으니, 이반이 자리를 비켜주기만 한다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 된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의 의향을 확인하기 위해 그와 대화를 시도한다. 이야기 도중에 당신이 자리를 비우면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을 흘린다. 일종의 시험이다. 그런데 이반은 그의 말을 듣고도 (어쩌면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집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조시마 장로가 맡긴 사명

 

소설 앞부분에서 카라마조프 가족 전체, 그러니까 아버지 표도르와 세 아들 모두 알료사가 기거하는 수도원에서 모이는 대목이 있다. 그들은 수도원의 수장인 조시마 장로를 만난다. 그러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한 그 모임에서 표도르와 드미트리는 서로의 악행을 고발하며 갈등과 적개심이 극에 달하고 만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장면이 펼쳐진다.

 

장로는 드미트리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완전히 조아리며 의식적으로 절을 했다. … 장로의 입가에는 가냘픈 미소가 가늘게 빛나고 있었다.

 

조시마 장로가 드미트리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다니. 무슨 일일까? 다음날 조시마 장로는 알료사에게 드미트리를 만났느냐고 묻는다. 알료사가 못 만났다고 하자 장로는 어서 형을 찾아보라고 재촉한다. “내일 다시 나가서 급히 찾아내.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말이다. 어쩌면 아직은 끔찍한 일을 사전에 막을 수도 있을 테니까. 어제 난 앞으로 그에게 닥칠 위대한 고난을 향해 절했던 것이란다.” 알료사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묻는다. “어떤 고난이 형님 앞에 놓여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어제 내가 끔찍한 것을 본 것 같았거든. … 어제 네 형의 눈은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 네 형의 눈빛을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몰라.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 일이 보였거든. 사람의 얼굴에서 그런 눈빛을 발견한 것은 내 평생 한두 번에 불과해. … 그 눈빛에 장래의 운명 전체가 반영된 듯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운명은 그대로 실현되었어. 내가 너를 너희 형한테 보냈던 것은, 알렉세이. 형제로서의 너의 얼굴이 그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아버지와 형의 갈등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스메르자코프라는 비상한 지성과 연기력, 냉혹함까지 갖춘 악인이 그 둘의 갈등을 증폭시켜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고 있었다. 알료사는 과연 스메르자코프라는 강적에 맞서 장로가 맡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첫 번째 오판

 

스메르자코프가 자신의 모든 불행의 시작인 표도르를, 자기를 무시하고 위협하고 폭력도 휘두르는 망나니 드미트리의 손으로 제거하고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설계가 완성되었다. 자신은 그 시간에 맞춰 적당히 알리바이를 확보하고, 표도르가 그루센카를 위해 챙겨둔 돈, 자신이 표도르의 아들로서 받아 마땅한 유산에 비하면 정말 약소하기 그지없는 돈, 하지만 아무도 모르기에 안전한 돈을 챙기면 된다. 그리고 그 돈으로 적당한 시기에 프랑스로 떠나면 된다.

 

소설 전반부에서 작가는 드미트리가 얼마나 즉흥적이고 폭력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인지, 아버지를 얼마나 경멸하고 증오하는지 묘사하는 데 아주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많은 분노, 질투, 원한, 살의, 초조함, 압박에 시달리는지 자세히 소개한다. 그런 다음 표도르가 살해당했을 때 범인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그가 범인임을 말해 주는 동기, 정황증거, 증인이 수두룩하다. 반면 그가 무죄를 주장하며 내세우는 논리는 허술하고 빈틈투성이다. 그의 말을 뒷받침해 줄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다.

 

그러나 스메르자코프가 그렇게 모든 조건을 만들어 주었는데, 드미트리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결국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를 미워하고, 폭력적이고, 아버지를 죽일 거라고 누누이 말해 왔으며 절굿공이로 사람을 죽일 뻔했고 난폭한 행동으로 다른 가족에 큰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스메르자코프로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스메르자코프는 할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성가신 일이긴 했지만, 표도르가 죽으면 드미트리가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스메르자코프로서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저 일이 좀 복잡해졌을 뿐, 표도르가 죽는다는 사실도 살인죄의 책임을 질 사람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기껏 자기 손으로 일을 완수하고 보니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한다. 긴말하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고 알아서 자리를 피해준 ‘공범’ 이반이 찾아와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뻔뻔하게’ 스메르자코프를 몰아붙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작은형이 아니에요!

 

이반은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형 드미트리가 범인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길에서 만난 동생 알료사에게 드미트리를 두고 “살인범”, “짐승 같은 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알료사는 드미트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이반은 “묘한 냉기를 풍기며” 그럼 누가 살인범이라는 거냐고 묻는다. 그의 질문에 알료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어요.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이 이반 형은 아니라는 거죠.”

 

이런 뜻밖의 말에 이반은 깜짝 놀란다. 알료사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버지가 죽고 이반이 고향으로 돌아온 두 달 사이에, 이반이 혼자 있을 때마다 수없이 그렇게 말했었기 때문이다. 알료사는 이반 형의 거처를 방문했다가 정신이 나간 상태로 그렇게 혼잣말하는 그의 모습을 여러 번 봤던 터였다. 이반은 자신이 집을 떠난 행동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 스메르자코프와 이반의 암묵적인 합의를 알지 못했던 알료사는 이렇게 말한다.

 

형은 자신을 책망했고, 자기 말고는 그 누구도 범인이 아니라고 고백했어요. 하지만 살인을 한 것은 형이 아니에요. 형이 잘못 생각한 거예요. 형은 살인범이 아니에요. 내 말 좀 들어보세요. 그건 형이 아니라고요! 이 말을 전하려고 하나님께서 날 보내신 거예요.

 

이 부담스러운 말을 듣고 이반은 발끈하며 알료사에게 인연을 끊자고,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고 하고는 거처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도중에 어떤 충동에 이끌려 스메르자코프를 찾아간다. 막연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이반이 알료사의 말에 자극받아, 또는 용기를 얻어 진실을 대면하기로 하는 선택을 내린 것이다.

 

두 번째 오판

 

스메르자코프는 자신을 찾아온 이반의 속을 알 수가 없다. 두 사람 사이의 합의로 이반은 손쉽게 드미트리 몫의 유산 절반까지 차지하게 된 ‘윈윈’ 상황 아닌가. 그런데 왜 자꾸 찾아와서 성질을 부리고 다 끝난 얘기를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일까. 그가 아는 이반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는 “내세가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믿는 사람이요, 도덕적인 부담이나 형제애 같은 것에 메일 사람이 아니지 않던가.

 

그런데 이반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스메르자코프를 무시하고 모욕하고 자신은 고결한 사람인 것처럼 군다. 결국 스메르자코프는 약이 바짝 올라 승부수를 던진다. 자신의 실체를 보지 않으려 하고 여전히 도덕 원칙에 매이는 사람 행세하는 이반에게 던지는 돌직구다.

 

먼저, 스메르자코프는, “당신이 주범이요. 난 당신의 생각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이반에게 도발한다. “당신은 뭔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내 말을 듣고도, 당신이 없으면 형이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리를 피한 것 아니냐?”라는 질문도 이반을 주범으로 몰아세우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에게 결국 이건 당신 때문에 일이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반은 살인 사건 전에 스메르자코프와 대화를 나눈 뒤에 모스크바로 떠나는 기차에 올라 “난 비열한 놈이야”라고 혼잣말을 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일에 공모하고 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 후에 혼자 있을 때마다 자신을 책망했던 것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어떻게 할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자기가 자리를 비우면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한 상태에서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다음,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는 양말에 숨겨둔 돈 3천 루블을 꺼낸다. 드미트리의 주장이 거짓이고 그가 범인임을 보여 주는 가장 큰 물적 증거로 여겨진, 사라진 3천 루블이 스메르자코프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 돈이 여기 있어. 자, 어쩔 건데? 법원에 가져가기라도 할 건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내가 범인이라고 밝혀서 너도 같은 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람들이 퍽 좋아할 거야. 너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겠지.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우리는 운명 공동체야.”

 

이것은 대단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이반이 자신과 ‘같은 과’라는 확신에 자신의 운명을 건 셈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반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형이 만나 일이 벌어지게 하려는 스메르자코프의 계략에 수동적 방식으로 협력했었지만, 형이 아버지를 만나고도 자제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하나였다. 진범을 밝혀 억울하게 재판을 받게 된 형이 혐의를 벗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반이 그 돈을 챙기더니 다음날 법정에서 증언할 것이고 그 돈을 증거로 제시하겠다고 했을 때 스메르자코프는 깜짝 놀라고 만다. 스메르자코프가 볼 때는 더없이 불합리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본인에게 물질적으로도 이득이 될 게 없고, 평판만 땅에 떨어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스메르자코프는 드미트리에 대해 오판했던 것처럼, 이반에 대해서도 오판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발등을 찍은 꼴이 되었다. 이반을 압박하여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하려다 오히려 이반에게 죄책감을 벗고 바른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스메르자코프는 냉철하고 비상한 머리를 가진 악한이었지만 그가 이기적이고 불순한 의도에서 던진 승부수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스메르자코프는 모든 것을 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제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넌 날 부활시킨 거야

 

한편, 비슷한 시간에 알료사는 갇혀 있는 드미트리를 만나러 간다. 그날은 재판 전날이었다. 드미트리는 이미 오랜 시간 검사의 조사를 받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들의 수많은 증언을 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누구도 믿어 주지 않고 그것이 오히려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로 바뀌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드미트리와 알료사는 무죄 판결을 기대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반이 내놓은 탈출 계획 이야기를 나눈다. 헤어지기 전에 드미트리는 이반이 “탈출을 권하면서도 정말로 내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고 있다”고 말한다.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빛으로 이반의 생각을 짐작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알료사에게 묻는다. “너는 내가 살인을 했다고 믿는 거냐?” 그는 진실만을 말해 달라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며 묻는다. 알료사는 그 질문에 “송곳으로 찔린 듯”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단 한순간도 형님이 살인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 서약이라도 하듯 오른손을 치켜들고서.

 

그 순간 미짜(드미트리)의 얼굴에는 다행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다. “고맙구나!” 그는 기절했다가 숨을 몰아쉬며 깨어나는 사람처럼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이제 너는 나를 부활시킨 거야. …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난 네게 그 말을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자, 어서, 어서 가! 넌 내게 내일을 대비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거란다.”

 

알료샤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밖으로 나왔다. 형이 “출구 없는 영혼의 비애와 절망의 깊은 심연”을 드러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절망, 비애, 한 명이라도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만 혹시 아무도 없을까 봐,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그는 한 줄기 빛을 비춰 준 것이었다. 그것이 없이 드미트리가 재판과 수형 생활을 맞이해야 했다면, 그가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원통함에 사로잡혔을까, 과연 그에게 희망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밀알 하나

 

모든 면에서 스메르자코프가 성공한 것 같았다. 표도르가 살해당하고 드미트리가 범인으로 몰리고 이반이 공모자가 되는 그림이 완성된 것 같았다. 스메르자코프는 뛰어난 감각과 지성, 냉혹함으로 배후에서 은밀하게 상황을 조종하는 ‘어둠의 군주’와도 같았다. 그런 스메르자코프의 큰 그림 앞에서 알료사가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일은 하찮고 부질없어 보였다. 그는 이반이 스메르자코프와 합의하는 것을 몰랐고, 아버지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형 드미트리의 무죄를 확신하고 그를 위한 증인으로 나섰지만, 심정적이고 직관적인 확신에 근거한 그의 증언은 그의 유죄 판결을 막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스메르자코프의 계획은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드미트리를 다 알지 못했고, 이반도 그가 아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알료사의 고군분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절묘하게 작용했다. 그는 절망에 빠진 드미트리에게 그의 무죄를 믿어 주는 한 사람이 되어 그를 “부활시킨다.” 그리하여 이후에 드미트리가 더 많은 난관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게 막아줄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 알료사는 또한 막연한 죄책감의 구덩이에서 허덕이던 이반에게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알료사의 작은 몸부림들은 작은 균열을 내고, 희망의 불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알료사가 사건의 내막을 다 파악했기에 찾아온 성과가 아니었다. 자기가 아는 선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감당했는데, 그 결과로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큰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시마 장로는 알료사에게 드미트리를 찾아가서 동생의 얼굴을 보여주라고, 그를 도우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만사는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고 또 우리 모두의 운명도 마찬가지겠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 있잖니. 이 말씀을 꼭 기억해 두거라.” 장로가 아끼는 제자에게 건넨 유언과도 같은 이 당부는, 자신의 작은 존재가, 자신이 하는 자그마한 일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결과를 낼지 모르는 상황에서 낙심하기 쉬운 오늘의 ‘알료사’들에게도 의미심장한 조언으로 다가온다.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문의나 제안, 글에 대한 피드백을 원하시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편집위원과 필자에게 전달됩니다.
_

<좋은나무> 카카오페이 후원 창구가 오픈되었습니다.

카카오페이로 <좋은나무> 원고료·구독료를 손쉽게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_

 


관련 글들

2024.03.13

둑에서 물이 샐 때 일어나는 일들: 디지털 시대의 불법 복제와 기독교 문화의 위기(정모세)

자세히 보기
2024.03.13

웹툰: 다시 탁구채를 들기를(홍종락)

자세히 보기
2024.03.04

영화 : 가족은 핏줄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최주리)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