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 제인은 “일어날 의지도, 도망칠 기운도 없었다.” 죽기를 갈망하며 힘없이 누워 있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안에서 생생하게 고동쳤다. 그것은 무언의 기도를 낳았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시편 기자의 애원이었다. “멀리하지 마옵소서.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줄 자 없사옵니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제인은 고아로 외숙모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지내다 자선학교에 입학한다. 거기서 학생으로 6년, 교사로 2년을 지낸 후,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자 신문에 광고를 내어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가 된다. 그리고 그 집의 주인 로체스터와 우여곡절 끝에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런데 결혼식을 앞두고 제인은 미래의 남편이 자신에게 온 세상이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거의 천국의 희망” 수준이었다. 일식으로 해가 가려지는 것처럼 로체스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제인에게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상 파괴

 

결혼식 날이 되어 두 사람은 주례 목사 앞에 선다. 이 결혼에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주례자의 의례적인 질문에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대답의 주인공은 로체스터의 매형과 변호사였다. 그들의 증언으로 로체스터가 결혼을 한 상태였음이 드러난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는 했다. 처가에서는 집안의 정신병 이력을 숨기고 혼사를 진행했고, 결혼 후 아내도 곧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내의 존재를 외부에 숨기기로 한다. 아내를 집안에 가둬 두고 간호사에게 고액의 보수를 지급하고 24시간 관리하게 한다.

 

한편 로체스터는 집을 떠나 외국을 떠돌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사기에 가까운 결혼의 피해자로 정신 이상의 아내에게 매여 살아야 한다는 절망감에서 나온 자포자기의 행동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혐오와 자괴감만 쌓여갔다. 그런데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 가정교사로 와 있는 제인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로체스터가 제인을 속이고 이중 결혼을 시도했던 것은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절박함의 발로였을 테다. 하지만 철저히 자기본위의 발상이기도 했다. 그의 처가도 견실한 남편을 붙여 주면 딸의 정서가 안정되고 정신적 문제의 악화를 막을 수 있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는 자신을 속인 처가와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삼촌이 사람들을 보냈고 그들이 때맞춰 결혼식장에 도착한 덕분에 결혼은 저지되고 제인은 중혼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으나, 당장 제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제인은 성경의 이미지로 자신의 절망을 표현한다. “내 희망은 모두 쓰러졌다. 하룻밤 사이 이집트의 장자들이 파멸을 당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부지불식간에 파멸이 닥쳤다.” 제인은 자신의 상황을 먼 옛날 이집트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우상을 앗아가시는 것으로 인식한다.

 

공세와 대응

 

절망 속에서 제인은 “일어날 의지도, 도망칠 기운도 없었다.” 죽기를 갈망하며 힘없이 누워 있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안에서 생생하게 고동쳤다. 그것은 무언의 기도를 낳았다.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시편 기자의 애원이었다. “멀리하지 마옵소서.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줄 자 없사옵니다”(시 22:11).

 

하나님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을 가렸던 우상의 실체가 드러났고, 로체스터에 대한 신뢰가 깨어졌다. 제인에게 로체스터 씨는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진실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중단되고 집에 돌아와 곧장 방에 들어가 한참을 있으면서 제인의 머리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명령의 형태로 떠오른다. ‘떠나라.’

 

제인은 떠나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로체스터는 제인을 순순히 보낼 마음이 없었다. 로체스터가 제안한 내용은 결국 하나다. “저주받은 장소, 아간의 장막”인 손필드 저택을 같이 떠나자는 것이다. 아간이 누구던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약탈물을 훔쳐다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긴 사람, 그래서 이스라엘 진영에 큰 저주를 불러온 사람이 아니던가. 자기도 모르게 로체스터는 정당한 아내가 아닌 제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후 이 제안을 관철하려는 로체스터의 공세와 그것을 거부하는 제인의 대응이 펼쳐진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로체스터는 자신의 제안에 제인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거칠게 대응한다. 제 성질을 못 이겨 말을 안 들으면 폭력을 쓰겠다고 협박한다. 그의 모습은 “참을 수 없는 속박을 끊어 버리고 곧장 무모한 분방함으로 뛰어들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제인이 “혐오감을 보이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제인은 두렵지 않았다. 마음속의 힘을 느꼈고 로체스터를 좌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는 편이 좋겠다는 상황 판단에 따라 실컷 울었다. 제인의 울음 앞에서 로체스터는 마침내 진정한다.

 

둘째, 우격다짐에 실패하자 로체스터는 이제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여 이해를 받으려 한다. 그런데 그 설명 과정에서 제인은 로체스터가 이미 여러 정부(情婦)를 둔 적이 있었고 그들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평가하는지도 알게 된다. 이것은 제인이 로체스터의 제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로체스터의 정부가 된다면 당장에 즐거움과 안락함을 얻겠지만 그런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제인 본인만은 이전의 정부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로체스터의 정부가 되겠다고 선택하면, 그 순간부터 제인은 이전의 정부들과 같은 선택을 내린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셋째, 우격다짐도, 구구절절한 설명도 통하지 않자 로체스터는 제인의 동정심에 호소한다. 더 나아가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한다. 당신이 떠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건 당신 책임이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여기서 그녀의 마음이 가장 흔들렸다. 자신이 떠나면 로체스터가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분에 집중했다. 로체스터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집요한 공세를 떨치고 적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결별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영화 <제인 에어> 스틸컷.

 

세인트존의 고상한 제안

 

이른 새벽에 긴급히 로체스터의 집을 나온 제인은 마차를 타고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간다. 차비로 가진 돈을 다 써버리고 마차에 가방을 두고 내리는 탓에 큰 위기에 처하지만 두 여동생과 함께 사는 세인트존 목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세인트존은 제인에게 일자리도 알아봐 준다. 지역 유지의 후원을 받아 농부의 아이들을 위해 여는 학교의 교사 일이었다. 배움이 부족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제인은 성심껏 가르쳐 좋은 결과를 낸다.

 

세인트존은 경건하고 강직한 신앙인의 표상과 같은 존재다.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보다 교인 심방을 더 반가워한다. 궂은 날씨, 늦은 시간에 심방 요청이 오면 오히려 사명감과 희생정신이 불타오른다. 하지만 그는 시골 지방에서 작은 교회 교인들을 섬기는 정도로 만족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크게 쓰임 받고 싶어 한다. 지역 유지의 아름다운 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함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거부한다.

 

어느 날, 세인트존이 함께 인도로 가서 선교의 일을 감당하자며 제인에게 청혼한다. 심지가 굳고 돈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맡은 일을 성실하고 유능하게 감당하고 권위에 순종할 줄 아는 제인이 선교의 동역자로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동역하되 친족 관계(알고 보니 세인트존은 제인의 사촌 오빠였다!)나 사명감 정도의 끈으로는 부족하고 결혼의 끈으로 단단히 묶여야 한다고 말한다.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것은 여기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제인은 세인트존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고귀한 목표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사람이요, 동역자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할 사람이었다. 제인이 청혼에 응한다면, 그것은 행복한 결혼생활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을 갈아 넣는 봉사의 인생이 될 테고 자신의 존재는 세인트존의 그늘에서 시들어 가리라. 하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희생 같은 게 아닐까.

 

자신의 목적이 훌륭하고 선하다고 진심으로 믿기에 너무나 진지하고 자신만만한 세인트존의 압박을 받으며 제인은 어느 순간 그가 존경스러워 보인다. “그와 씨름하기를 그만두고 그의 의지의 급류를 타고 그의 존재의 만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내세를 위해 지상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제인은 옳은 일을 하고 싶었다. 세인트존의 청혼은 원칙의 틀에서 대답할 수 없는 판단의 문제였다. 그녀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하는 문제를 자기의 판단에 맡기라는, 확신에 찬 남자의 청혼(이라고 쓰고 ‘동업 제안’이라고 읽는다) 앞에서 고뇌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윤리적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던 제인은, 신앙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제인은 특별한 도움을 경험한다.

 

뜻밖의 기도 응답이 말해주는 것

 

옳은 일을 하기를 바라며 제인은 기도했다. “제게 알려 주세요. 제게 길을 알려 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더니, 심장을 관통하는 어떤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인, 제인, 제인!”

 

어디서 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누구 목소리인지는 분명했다. 제인을 간절히 찾는 로체스터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녀는 “제가 갈게요!” “기다려요! 제가 갈게요!”라고 외치며 문간으로 뛰어나가 복도를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정원으로 달려 나갔지만 거기도 비어 있었다.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며 돌아다녔지만 “사방은 황야의 쓸쓸함과 한밤의 적막뿐이었다.”

 

제인은 이것을 기도 응답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세인트존에게 명확한 거절의 뜻을 밝힌 후, 집으로 들어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자신을 부르는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제인의 생각은 선명해진다. 세인트존이 신앙적 확신에 근거하여 들이미는 청혼은 로체스터의 안위를 확인해야 한다는 시급한 과제 앞에서 힘을 잃는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분명해진 마음으로 제인은 누워서 날이 밝기만 기다린다.

 

날이 밝자 제인은 로체스터를 찾아 떠난다. 다시 만난 로체스터는 제인이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날 그 시간에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다음 자기도 모르게 “제인! 제인! 제인!”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제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제인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화답하며 했던 말들이었다.

 

제인의 기도 응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인트존이 아니라 로체스터의 목소리였다. ‘지금’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들어서는 안 될 때가 있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연인 로체스터가 제인의 우상이 되었을 때였다. 그가 제인을 속이고 정부로 삼고자 하던 때였다.

 

그때 제인은 다른 사람들의 개입과 마음을 지켜주시는 은혜에 힘입어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그의 곁을 떠났었다. 그런데 제인이 떠나 있던 기간에 있었던 일로 로체스터는 홀아비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사람,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자가 되어 있었다. 제인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될 때가 되었다. 아니 기울여야 할 때였다. 그는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제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제 비로소 로체스터와 제인은 서로에게 우상이 아니라 선물이 될 수 있었다.

 

행복의 비결

 

어떤 것들은 직접적으론 얻을 수가 없고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겨울철 너무너무 추운 방에 있던 사람이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밖에 나가 ‘열기’를 가져오리라 마음먹는다고 해 보자. 물론 가당찮은 일이다. 아무리 큰 가방을 들고 나가봐야 열기를 가져올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열기’를 얻을 수 있을까? 간단하다. 땔감을 가져오면 된다. 그래서 난로에 불을 피우면 열기는 저절로 따라온다.

 

영국의 성공회 신부 J. 존은 『행복의 비결』(The Happiness Secret)에서 행복이 이와 같다고 했다. 행복 자체를 추구해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원칙을, 옳은 길을 추구할 때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제인이 다른 것을 다 내던지고 로체스터를 얻고자 했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로체스터는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하는 삶은 그녀에게 기쁨을 안겨 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은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 『제인 에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덕의 원칙을 따르고 옳은 일을 추구한 끝에 참된 사랑과 행복을 거머쥔 한 주체적 여인의 삶을 매력적으로 그려 낸다. 그 삶에는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지만 그 모두를 딛고 나아가게 해줄 만큼 도움 또한 부족하지 않았다. 이런 삶을 두고 아름답고 복되다고 할 수 있겠다. 『제인 에어』는 독자를 그런 삶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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