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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목회자 가족은 자기들의 밥솥 불빛이 한 사람에게 생의 의지를 주게 될 줄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냥 자기들의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희미한 빛의 도구로 쓰였다. 내 인생의 희미한 빛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혹시 일어난다 해도,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리라.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작년 말, 두 주 가까이 울적한 기분에 시달렸다. 가슴이 먹먹하고 지난 일에 대한 회한, 지금 가진 것이 사라질 거라는 불가피한 미래에 대한 서러움이 수시로 밀려들었다. 툭하면 눈물이 나고 우울해진다던 남성 갱년기인 건가.

 

분명한 외부적 요인들이 있었다. 일단 사회적 상황이 너무 혼란스럽고 답답했다. 대통령이 저지른 일과 이후의 답답한 상황은 정치에 무심한 나조차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거기다 뜻밖에 들려온 너무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 소식은 일순간 세상의 색깔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 중간쯤에 나는 아팠다. 감기가 유행한다니 어디선가 옮았으리라. 몸이 불편하니 마음도 약해졌을 수 있겠다. 거기에 더해, 두어 달 전에 큰 탈이 났었던 이가 다시 아파왔다. 의사가 발치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던 바로 그 이였다. 나이가 들고 이가 하나 빠지는 게 뭐 그리 대수랴. 하지만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것이 하나씩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 느낌이 몸으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은 아주 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작부터 문제를 일으키던 컴퓨터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검색에 의지하여 여러 날 자가 치료를 시도하고 부품도 하나 교체해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수리점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다음날 연락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컴퓨터를 찾으러 가보니, 내 컴퓨터의 데이터가 통째로 삭제되고 없었다. 데이터 복구 전문이라고 광고하는 그 컴퓨터 업체에서 말이다. 전날만 해도 그렇게 유능해 보이던 직원이 내게 물었다.

 

어떡하죠?

 

동창생의 실낙원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다 동네 형 만수의 삼촌을 찾는 작업에 끌려든 복학생 병필. 만수는 여동생을 보내어 삼촌을 찾는 병필을 돕게 한다. 만수의 여동생은 병필의 동창이기도 했다. 병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1)

 

삼촌은 노숙인들 사이에서 지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삼촌의 정보를 얻으려면 노숙하는 형님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병필이 노숙인들처럼 광장에서 죽치고 앉아 말을 섞고 서울역 광장에서 같이 잠을 자도 그들은 그에게 옆을 내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병필은 노숙을 흉내 내는 가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노숙인들은 자기들의 형편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처지”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삼촌은 노숙자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그런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을까? 병필은 자신의 도우미 동창생에게 묻는다. 너는 감이 오는 거 없냐고. 삼촌이 노숙인과 어울리며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이 질문에 동창생은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답한다. 과거에 운동을 했던 때의 이야기다. 아니, 운동을 하다 좌절한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그녀는 유망한 체조선수였다. 고등학교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아시안게임 준비 도중 도마에 착지하다가 십자인대가 파열했다. 수술하고 회복하는 데만 6개월이 넘게 걸리는 큰일을 당한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급한 마음에 욕심을 내다가 재파열이 되었다. 선수 생명이 끝났다는 생각이 밀려든 그 순간을 그녀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 말은 체조가 좋다는 어린 조카에게 삼촌이 했던 말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삼촌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살겠다는 말과 같[다]”며 “체조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으니 그 꿈이 너를 살게 하겠구나”라고 말했었다.

 

조카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을 그 말은, 체조를 잃어버리는 일이 어떤 무게로 다가올지 예언하는 말이기도 했던 셈이다. 체조할 때 제일 행복했던 동창생은 체조를 잃으면서 낙원도 잃어버렸다.

 

희미한 빛

 

두 번째 전방십자인대 수술을 하고 재활병원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새벽, 동창생은 잠이 오지 않아 병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높은 건물로 올라갔다. 환자복 차림으로 건물 옥상에 올라선다. 그녀는 혹시 몹쓸 생각을 하는 것일까?

 

다행히 그냥 옥상에서 내려온 그녀의 눈에 허름한 상가교회가 들어온다. ‘행복한 교회’다. 가난한 교회라 가져갈 것이 없어서일까? 문이 열려 있다. 교회 안은 너무 컴컴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상구 등을 의지해 간신히 발밑을 확인하고 장의자 맨 뒷좌석을 더듬어 앉았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죽고 싶습니다.

 

소녀의 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듯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드르렁 푸.

 

하나님의 응답은 어디 가고 코 고는 소리만 들려온다. 잠시 후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녀는 교회 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몇 컷에 걸쳐 동창생의 시선을 따라간다. ‘드르렁 드렁’ 코 고는 소리를 배경으로 ‘아주 작은 불빛 하나’가 보이고 그 빛에 코 고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고, 그다음에는 설교단 주변이 희미하게 보인다. 코 고는 성인 남자, 뒤척이는 아이를 다독이는 성인 여자의 목소리. 가족이리라.

 

그들을 비추던 주황색 불빛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전기밥솥의 전원 램프였다. ‘새끼손가락의 손톱보다 작은’ 그 불빛이 설교단 뒤에서 자는 가족을 비추고 있었다.

 

여기서 동창생은 문득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가난한 목회자의 가족이 저렇게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데, 신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동창생은 밥솥과 칭얼대는 아이의 목소리가 자꾸 가슴을 쳤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신에게 인생을 헌신한 저 가족도 저렇게 내버려두는 신이 내게는 관심이 있을까?

 

나 같은 거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든 [말든]

신은 꿈쩍도 안 할 거 같다.

 

이 생각과 함께 동창생은 장의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더 이상 기도하는 게 소용이 없겠다는 판단이 든 것일까. 그리고 더듬더듬 출구를 찾아서 문을 여는 그녀에게 떠오른 또 다른 생각.

 

손톱만 해도 빛은 빛이구나.

희미하게라도 주변을 비추잖아.

 

그런데 그 빛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야 겨우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그녀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희미하게라도 살아볼까.’

 

웹툰 <나도 사람이야> 포스터.

 

희망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희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절망하여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삶의 희망을 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동창생이 그 작은 빛을 보고 삶의 의지를 불태운 것이 과연 합당할까? 그것은 비논리적인 비약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자면 절망도 비논리적인 비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전후 상황을 ‘합리적으로’ 다 따져보고 나서 절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동창생이 눈앞의 몇 장면을 근거로 그 목회자 가족이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판단하고, 자기도 신의 관심을 받지 못할 거라는 결론으로 내달린 것처럼 말이다. 절망은 어떤 사건, 장면, 인상이 각인되고 그것에 압도되면서 빠져드는 것 아닌가. 어떤 계기로든 일단 시야가 특정한 색깔로 물들면 온 세상이 그 색으로 보이게 되는 것 아닌가.

 

세상에는 희망과 절망을 품을 요소들이 다 있다. 빛과 어둠이 다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희망을 품고, 무엇으로 절망할 것인가.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결정되는 문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선판단이 작용한다. 세상을 어떤 곳으로 볼 것인가. 세상/하나님은 기본적으로 호의적인 곳/분인가, 적대적인 곳/분인가. 이런 세계관과 신관이 배후에 자리 잡고서 지금 보이는 상황을 해석하는 안경을 제공한다.

 

혹시 이 장면에서 동창생의 신앙, 혹은 신앙 가정에서 자란 영향2)이 바로 이런 해석 작업에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까? 희미한 빛을 보고 희미하게 살아보자는 동창생의 판단은, 신앙에 힘입어 밥솥의 희미한 빛을 더 큰 빛, 온전한 빛의 조각으로 볼 수 있었던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구름을 뚫고 나오는 한 줄기 빛에서 구름에 가려진 찬란한 해를 떠올리고, 아직 쌀쌀한 날씨에 피는 스노우드랍(봄맞이꽃)은 한 송이 꽃일 뿐이지만 봄의 전령임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가난한 목회자 가족은 자기들의 밥솥 불빛이 한 사람에게 생의 의지를 주게 될 줄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냥 자기들의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희미한 빛의 도구로 쓰였다. 내 인생의 희미한 빛도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혹시 일어난다 해도,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리라.

 

차 한 잔의 여유

 

내가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서두의 내 이야기로 돌아가 마무리를 해 보자. 병필의 동창생이 겪었던 인생의 큰 시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버겁게 다가오는 시간을 보냈다. 특히 데이터가 날아간 후, 나는 나를 무겁게 누르는 상실감과 허무감, 무력감을 느꼈다.

 

그나마 당장 하고 있던 번역 작업의 원고는 상당 부분 백업이 되어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해당 출판사에 자료를 다시 요청해야 했다. 사정을 설명하고 자료를 요청하는 톡을 보냈더니 출판사 국장님이 커피와 케이크 쿠폰을 하나 보내주었다. “너무 바쁘게 일하다 보면 결정적일 때 그런 사고가 나곤 합니다. 잠시 휴식하시라 그런 일이 생긴 듯합니다. 차 한 잔의 여유를 선물합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날 나는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 마음이 따뜻해지고 세상이 좀 밝아지는 선물까지 덤으로 받았다. 그런 배려가 주는 큰 힘을 경험하고 보니,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소소한 관심과 배려가 달리 보인다. 나도 나름의 방식으로 차 한 잔의 여유를 선물하며 살아야지, 하는 다짐도 따라온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희미한 빛으로 다가갈지, 누가 알겠는가.

 


1)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에 이야기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전편 글 “<나도 사람이야>: 광장이 광야가 될 때”(홍종락)를 참조하라(편집자 주).

2) 그녀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그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오빠는 신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동창생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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