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거울은 쇼윈도(show window)와 스크린으로 대치되었다고들 한다. 1920년대 미국의 백화점들의 중요한 마케팅 도구로 등장한 쇼윈도는 욕망을 비춰준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결코 만질 수는 없게 하는 쇼윈도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결국 쇼윈도와 스크린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대신에 ‘내가 되고 싶고 갖고 싶은 나’의 잠재된 욕망을 일깨우며 거울이 지녔던 자아발견의 요소를 대치해버렸다. 지금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더 중요한 세상이다.(본문 중)

[문화 안의 어떤 세상]

뷰티 인&아웃사이드

 

윤영훈(성결대학교 신학부 교수)

 

I’m starting with the man in the mirror.

I’m asking him change his ways.

나는 거울 속의 사람과 시작하지.

나는 그에게 삶의 방식을 바꾸라 말하지.

마이클 잭슨이 부른 “Man in the Mirror”의 한 소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울 속의 남자는 누구일까? 그는 바로 나 자신이다. 거울은 인류 최초의 복제 미디어이다. 거울은 나 자신의 얼굴을 객관화해 보여준다. 우리는 거울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종종 어색함을 느낀다. 그 사람이 싫을 때도 있고, 측은하게 보일 때도 있고, 또 왠지 낯설기도 하다. 거울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외모만이 아니다. 때론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기도 한다. 거울은 예전부터 자신의 존재와 삶을 반추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물건이었다.

 

Michael Jackson의 노래 ‘거울 속의 남자’의 커버 사진.(ⓒWikipedia)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거울은 쇼윈도(show window)와 스크린으로 대치되었다고들 한다. 1920년대 미국의 백화점들의 중요한 마케팅 도구로 등장한 쇼윈도는 욕망을 비춰준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결코 만질 수는 없게 하는 쇼윈도는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결국 쇼윈도와 스크린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대신에 ‘내가 되고 싶고 갖고 싶은 나’의 잠재된 욕망을 일깨우며 거울이 지녔던 자아발견의 요소를 대치해버렸다. 지금은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보여지느냐’가 더 중요한 세상이다.

심리학 용어가 된 ‘페르소나’는 본래 가면, 즉, 또 다른 나의 얼굴을 의미한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 숭배에서 연극이 유래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신은 늘 정면을 응시하며 지켜보는 존재이다.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바보짓에 감동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그들 속의 광기와 야만성을 쏟아내게 하므로 그의 출현은 공포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또한 그와 교감하는 인간을 인간적인 조건에서 해방하여 잠시나마 평화와 기쁨을 주는 매력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은밀히 훔쳐보기 위해, 또는 내가 숭배하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인간의 가면 놀이는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는 더 나은 가면을 가지기 위해 투쟁한다. 그렇게 수많은 가면을 쓰고 다니다가 나는 나의 진짜 얼굴을 잊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서구 미술사를 보면 17세기부터 자화상이 특별히 유행했다. 화가들은 자화상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탐색한다. 루벤스는 10점 이상, 렘브란트는 60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고흐의 자화상들은 그의 예술적 여정의 상징이다. 프랑스 화가 쿠르베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삽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1854년에 그린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가 그 좋은 예이다. 이 그림에서 부유한 후원자들을 만나는 쿠르베는 옷차림은 수수하지만 오만하게 고개를 들고 있으며 그 바람에 수염도 하늘을 향해 추켜올려져 있다. 돈 앞에서도 당당한 예술가의 자존심이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자화상으로 촉발된 자기 분석 경향은 근대의 상징이다.

 

구스타프 쿠르베의 작품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한편 노르웨이 화가 뭉크가 그린 “절규”(1893)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자아를 만난다. 불타는 석양을 등지고 다리 위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절규하고 있다. “절규”의 캐릭터는 이후 영화 “스크림” 속의 살인자의 가면으로 “나 홀로 집에”에서는 캐빈의 익살스런 표정으로 패러디되기도 하였다. 그림 속의 얼굴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마치 해골이나 유령과도 같다. 그럼에도 이 얼굴은 그 어느 초상보다도 더 극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현대 문화 속에서 점차 인간성과 자아가 해체되므로 받게 되는 충격이 담겨있다. 그림 속의 사람은 메두사처럼 무시무시한 타인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소멸되어 가는 것에 ‘절규’하는 얼굴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그림은 예언자적 회화로 평가받는다. 2012년 여러 버전 중 하나가 경매에서 1억 2천만 달러에 판매되어 당시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뭉크의 작품 ‘절규’

 

얼굴은 우리 몸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곳이다. 그만큼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타인의 시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서 진정한 자존감이 시작될 수 있다. 단지 예쁨과 추함을 넘어 얼굴은 내 존재를 나타내는 육체적인 서명이다. 얼굴의 각 기관들, 눈과 귀와 코와 입은 모두 감각기관을 넘어 복잡한 의미 체계로 나의 얼굴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수많은 상징이 모인 조각보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7)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새로운 왕을 세울 사명을 지닌 사무엘은 장남 엘리후의 외모를 보며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아들들을 모두 만났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다. 이에 사무엘은 이새에게 묻는다. 혹시 다른 아들이 있습니까? 이새는 막내가 있는데 그는 지금 양을 치고 있다고 말한다. 사무엘은 곧 그 아들을 불러오게 한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6:12)

결국 하나님도 외모를 보시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의 중심의 아름다움이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이다. 그때까지는 아버지도 형제들도 다른 어느 누구도, 그리고 아마 다윗 자신도, 이 막내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무엘이 기름 뿔 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16:13)

이름 없는 ‘막내’에 불과했던 다윗은 이 순간 비로소 이름이 소개되고 새로운 존재로 기름부음 받는다. 얼굴이란 말은 두 가지 단어로 합성된 말이다. 바로 정신을 의미하는 ‘얼’과 형상을 의미하는 ‘꼴’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얼굴은 그 모양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정신들도 표현한다. 우리가 가꿔 가야할 얼굴의 아름다움은 외모의 아름다움을 넘어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중심의 아름다움이다. 사무엘은 한 소년의 얼굴에서 그 중심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링컨은 “사십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얼굴은 우리의 지난 삶의 자취를 담고 있다. 기나긴 시간과 수많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여러 표정을 지어 왔다. 이렇게 반복한 표정들이 나의 인상을 이루었다. 삶의 흔적과 인상은 시술과 성형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과연 내 얼굴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오늘도 거울 속의 한 사람을 마주하며 지난 삶의 많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어 본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만들어갈 앞으로의 얼굴과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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