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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의무를 기꺼이 짊어지는 것, 이것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연약한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살고 싶은 의지도, 욕심도 없는 가운데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거의 유일한 방편이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작가 한강이 한 유명한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라는 말 말입니다. (본문 중)

 

정영훈(경상국립대 교수, 문학평론가)

 

『바람이 분다, 가라』는 작가 한강이 쓴 2010년 작품입니다. 주요 인물로는 1인칭 화자이고 작가이자 번역가인 이정희, 재능을 인정받은 화가이며 1년 전 자동차 추락사고로 세상을 뜬 친구 서인주, 서인주의 외삼촌으로 ‘내’가 사랑했던 이동주, 그리고 미술 평론가이자 대학 교수인 강석원 등이 있습니다.

 

소설은 ‘내’가 절친한 친구였던 인주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인주의 1주기 특집기사에 실린 강석원 교수의 글 때문이었습니다. 강석원은 인주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가, 죽음에 친화적이었던 그녀의 작품 세계와 잘 어울린다거나, 자살이야말로 그녀가 지향했던 예술적 욕망의 최종 형태였다거나 하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지요. 그는 이런 사실들을 토대로 인주가 예술에 자신을 전부 바친 예술가임을 증명해 낼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인주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던 강석원은 이 일에 자기 전부를 걸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나’는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보는 이런 견해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강석원을 만나려 합니다. 강석원이 서인주의 평전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강하게 만류하고, 강석원이 인주의 작업실을 인수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한번 가 보기를 요청하고, 나중에는 작업실에 들어가기 위해 신분을 속여 열쇠를 복사하기도 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인주와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수소문해서 만나고 인주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으기도 합니다.

 

사실 강석원이 본 대로, 인주는 죽음에 친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주의 삶의 조건 자체가 그랬습니다. 인주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외삼촌은 혈우병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오다 결국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런 주위 환경이 인주를 자연스럽게 죽음 가까이로 이끌었을 법합니다. 인주가 나고 자란 환경, 연약한 육체와 정신을 생각하면,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간주하는 강석원의 해석은 비교적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서인주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라 이름 붙이려는 시도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합니다. ‘나’는 그 죽음이 한낱 사고사, 혹은 사고를 가장한 타살이었을 뿐이라고 증명해 내려 애씁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주는 ‘나’의 집요함은, ‘내’가 살아온 지난 몇 년간의 삶을 생각해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때 유망한 희곡 작가였던 ‘나’는 지난 8년 동안 작품을 전혀 쓰지 못했습니다. 유부남인 K를 사랑했고, 마침내 그와 결혼하게 되지만, 3년이 지나 둘의 관계는 파탄에 이릅니다. 이혼 직전 그를 증오하면서 죽일 생각까지 했지만 인주의 만류로 포기한 후 오히려 자신을 해치고 말지요. 자살을 시도한 것인데, 이것이 생애 세 번째 자살 시도였습니다. 인주가 죽고 난 후 1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분명히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근이 버티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10년 가까이 무기력한 삶을 이어온 ‘나’에게 이런 의지를 심어 주었던 것일까요.

 

‘내’가 인주의 죽음이 자살로 처리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주의 아이입니다. ‘나’는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해석한 그 책이 아이에게 미칠 영향을 염려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인주는 알코올중독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그 어머니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나’는 인주가 자기 어머니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얼마나 불안해 했는지,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주가 얼마나 애썼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분다, 가라』 표지 ⓒ문학과지성사

 

인주가 의지적으로 술을 멀리하고 삶에 강한 애착을 보인 이유는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연결고리, 이를테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나쁜 피’를 자기 대에서 의지적으로 끊어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나쁜 피’를 자기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인주의 이런 모습을 옆에서 보아온 ‘나’였기 때문에, 정희는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보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보는 시각은 인주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고, 나아가 남은 아이에게도 인주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불안과 고통을 남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내’가 보기에 인주는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인주가 죽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인주의 죽음을 곱씹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둘 가운데 누군가가 꼭 죽어야 했다면, 먼저 죽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고 말입니다. 혹 자신이 죽더라도 인주는 이 죽음을 잘 견뎌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요.

 

“둘 가운데 누군가가 꼭 죽어야 했다면”이라는 생각은, 인주가 죽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이 죽음의 원인으로 자기 자신을 지목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살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부족해서 자기 대신 친구가 죽은 것은 아닌가, 죽음을 벗 삼아 살고 있는 자신이 친구를 감염시켜 애먼 친구가 죽은 것은 아닌가, 마치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했고, 그래서 인주가 죽은 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인주의 죽음과 자기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음에도 ‘나’는 그게 자기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깊은 죄책감을 느낍니다. 자신이 삶을 얼마나 가볍게 여겨 왔는지 새삼 깨닫기도 합니다. 이 깨달음은 나중에 “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로 이어집니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나’와 강석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둘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집니다. ‘내’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사방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생각합니다. “살고 싶다”라고 말이지요. 이렇게 무릎이 짓이겨진 채로, 배로 바닥을 밀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데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살고 싶다는 의지는 나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로부터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누군가가 나에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이 명령을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들을 수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인 선주는 한때 의지했지만 사이가 틀어져 버린, 이제는 병원에서 남은 삶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선배 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 『흰』에서는 세상에 나와 고작 두 시간을 살다가 세상을 뜬 언니에게 어머니가 했던 말을, 성인이 된 ‘내’가 중얼거려 봅니다. 언니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도 나에게 이 말을 되돌려 주었을 것입니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하고 말이지요.

 

‘내’가 인주의 죽음에 관여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 명령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명령은, 살아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는 살아남아서 인주의 평전을 써야 했습니다. 이 책임을 안고 ‘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수많은 죽음들에도 불구하고 인주가 얼마나 삶을 사랑한 사람이었는지, 아이에 대해 얼마나 큰 책임을 지고 있었는지 입증해 보이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매달립니다. 저는 이런 ‘나’, 이정희의 삶을, 의무를 짊어짐으로써 가능해지는 삶, 책임져야 할 일을 동력 삼아 버티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의무를 짊어짐으로써 비로소 살아야 할 힘을 얻는 것은 비단 이정희만이 아닙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주인공인 경하는, K시에서 일어난 학살에 관한 소설을 쓴 이후 4년 동안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유서를 썼다 찢기를 반복하며 근근이 살아갑니다. 이 무기력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한 것은, 애초에 경하 자신이 제안했던 일, 곧 학살로 죽은 사람들의 혼을 애도하고 위로하는 작업을 다시 시작하자는 친구의 권유였습니다. 『채식주의자』에서, 광증으로 치닫고 마침내 삶을 놓아 버리게 되는 영혜와 달리, 언니인 인혜가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 속에서 끝내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돌보아야 할 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먹여야 하는 의무가 인혜를 삶으로 이끈 것입니다.

 

주어진 의무를 기꺼이 짊어지는 것, 이것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연약한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살고 싶은 의지도, 욕심도 없는 가운데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거의 유일한 방편이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작가 한강이 한 유명한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라는 말 말입니다. 오늘 한 이야기의 맥락에서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다시 써 보고 싶습니다. 연약한 자가 더 연약한 자를 돌보고, 더 연약한 자가 연약한 자를 구원해 준다고, 상처받고 연약한 자로서, 더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고, 이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가 우리를 살리는 힘이 된다고, 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한 의무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 의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명과 연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의무의 내용을 이루는,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바로 그 일과 연결될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 우리 현실에서도,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의무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저는 잘 모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이런 삶을 살아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고, 실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도 그렇다고 대답할 근거가 적어도 저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의식하며 살 때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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