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학대에는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보호와 양육을 하지 않는 방임도 포함된다. 학대와 방임은 성인도 견디기 어려운 일인데 아이들이 그런 경험을 한다면 얼마나 충격이 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학대와 방임이 주로 아동에게 벌어지는 것은 힘의 불균형 때문이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양육자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양육자의 위압을 벗어나기 어렵다. 가해자 또한 자기보다 약한 대상에게 학대와 방임을 시도하므로, 그 대상은 어리고 약한 아이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본문 중)

최의헌(목사, 연세로뎀정신과 원장)

 

최근에 아동 학대에 대한 뉴스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아동 학대는 늘 비슷한 수준으로 있어 왔다. 이렇게 아동 학대의 현실이 노출되어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인 듯하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집안일은 집안에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에 가족에 의한 학대를 집안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인식이 변하고 있다. 아동 학대와 방임은 집안 문제가 아니라 법적인 제재가 필요한 사회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아동 학대 상황을 살피는 것은 사적인 영역에 대한 괜한 간섭이 아니며, 오히려 이웃의 적극적인 개입과 중재가 필요한 일이다.

아동 학대에는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보호와 양육을 하지 않는 방임도 포함된다. 학대와 방임은 성인도 견디기 어려운 일인데, 아이들이 그런 경험을 한다면 얼마나 충격이 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학대와 방임이 주로 아동에게 벌어지는 것은 힘의 불균형 때문이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양육자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양육자의 위압을 벗어나기 어렵다. 가해자 또한 자기보다 약한 대상에게 학대와 방임을 시도하므로, 그 대상은 어리고 약한 아이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슷한 이유로, 노인과 장애인과 여성이 주로 가정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도 주변의 적극적 관여가 중요함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피해자가 힘 있는 대상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가해자가 인식하면 함부로 다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작은 부분에서라도 학대나 방임의 정황이 발견되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오늘은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고, 학대받은 아동의 치료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해 나가려고 한다.

 

 

미취학 아동이나 저학년 초등학생은 심리적인 미숙함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시절에 각인된 경험은 성인이 된 후에도 객관적이지 않은 왜곡된 인식을 낳게 한다. 그래서 그 연령대에 부모의 다툼과 이혼을 경험하게 되면,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일을 자기 탓으로 여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듣게 되는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이 피해자들에게는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 아이가 학대와 방임을 어느 정도 벗어난 후 그 상황을 회상하고 재구성할 때, 그 일을 얼마나 자기 탓으로 여기는지를 묻고, 그 정도를 확인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도록 반복적으로 도와야 한다. 한 번으로 될 일이 아니다. 왜곡된 인식이 다 수정된 것 같아도 무언가 안 좋은 현실 경험을 마주하면 과거의 그 경험이 다시 떠오르면서 예전의 왜곡된 상태로 금세 되돌아간다. 그때마다 다시 반복하여 생각과 감정을 수정해야 한다.

아이들은 양육자에 대한 의존성이 높기 때문에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심리 과정을 반복한다. 쉽게 설명하면, 가해자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로서 “나쁜 부모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목회자들은 선악의 구분에 다소 강박적일 정도로 몰두하는 경향이 있는데, 학대와 같은 능동적인 악에는 경각심을 가지는 반면, 방임처럼 수동적인 악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도 한다. 아이에게는 나쁜 부모를 가진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예 부모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곱씹어 보면 흥미로운 점이 생긴다. 아주 어린 아이라도 본능적인 선악 개념이 있다. 아이들도 당연히 무엇이 좋은 줄 안다. 학대와 방임의 부모를 정말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런 부모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심리적인 과부하를 만들어 낸다. 물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부조리한 상황을 감내하는 경험을 하고, 그것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어쩌면 더 능력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부조리를 견디는 것은 부조리임을 분명히 알면서 애써 견디는 것인 반면, ‘공격자와의 동일시’는 스스로 세뇌를 하는 심리 과정이다. 그래서 나쁜 것과 좋은 것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심지어 나쁜 일이 벌어져야 맘이 편하다. 맞아야 잠을 잘 수 있고, 욕을 들어야 의욕이 생긴다. 이러한 왜곡된 심리가 어느 정도 형성된 피해 아동을 치료로 이끌 때, 아이를 사랑으로 대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피해 아동은 양부모, 아동 담당자, 상담사, 목회자 등과 같은 새로운 양육자를 만나게 되는데, 어떤 아이들은 새로운 양육자의 선한 의도를 짓밟고 화가 나게 만든다. 그래서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고 “저 아이는 천성이 나쁜 아이인가 봐. 학대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을 ‘투사적 동일시’라고 부른다.1) 이러한 관계 양상에 휘말리면 새로운 양육자는 아이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를 안기는 사람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학대나 방임을 당했던 아이를 그저 사랑으로 대하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새로운 양육자가 어떻게든 충분한 애정을 제공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좋지만, 아이의 반응이 예상을 벗어나거나 뭔가 이상하게 관계가 자꾸 꼬여갈 때는 아이의 심리적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시점이 왔다고 여겨야 한다. 여기서 아주 조심해야 하는데, 그 다른 방식으로서 강압적인 양육자 모습을 취하면 안 된다. 그런데 강압적인 방식이 실제로 통한다! 그래서 그 방식이 옳다고 착각할 수 있다. 아이는 ‘공격자와의 동일시’ 과정을 통해 ‘강압적인 양육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새로운 양육자에게 투영한다. 그러니 강압적인 양육자 모습이 통한다고 느끼는 순간, 오히려 “아, 내가 아이의 나쁜 부모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냉정히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양육자가 이러한 압력을 극복하고 적절하고 좋은 양육자가 되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여 합당한 양육 방식을 배워간다면, 비슷하게 아이도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관계 맺기 방식을 서서히 버리고 보다 적응적인 방식을 배워갈 수 있다. 정리하자면, ‘내가 아이의 가해 양육자와는 달리 무조건 좋은 양육자로 아이를 돌보겠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이고 순진한 것일 수 있다. 오히려, ‘나도 이 아이처럼 무언가 양육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이 아이와의 교류를 통해 나와 아이가 둘 다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해야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학대나 방임을 당한 아이들이 모두 새로운 양육자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기대고 엉기고 의지할 가능성도 있다. 학대와 방임에 오래 노출된 아이들은 새로운 대상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오히려 아무에게나 애착을 요구하는 식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양육자 입장에서는 후자가 더 편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둘 다 한쪽으로 치우쳐 문제가 된다. 애착은 선택적이어야 하며 대상과 시기와 장소에 따라 정도를 적절히 변경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이는 우선 애정에 차등을 주는 것을 잘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골고루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개념은 지금 배워야 할 순서가 아니다. 앞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양육이라는 개념은 너무 순진한 것이라고 했고, 지금은 하나님의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을 먼저 배우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는데, 목회자가 특히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적절하지 않은 접근을 종교적 명목으로 합리화하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목회자가 학대나 방임을 당한 아동의 새로운 양육자가 되려고 할 때는 이런 부분에서 냉정한 현실 이해와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아동 심리 전문가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치유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1) 이 경우 ‘투사’란 아이가 자신의 마음속 적대감을 자신이 아닌 새로운 양육자가 가지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끼며 양육자를 대하는 것이고, ‘투사적 동일시’란 그런 투사를 받은 양육자가 그런 적대감을 실제로 마음속에 품고 행하게 되는 것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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