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기윤실 30주년, 그 후 1년

[다시 기독교윤리의 과제를 묻는다 : 영성과 공공성에 헌신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글_송용원 목사
(은혜와선물교회 담임, 좋은나무 편집위원)

 

종교개혁 501주년이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작년 이맘때 그렇게 요란했던 개혁의 외침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신 대상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그분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주님을 보내주셨고 그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현주소를 진단하려면 한국 사회 현황을 보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 따르면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천만 이상)을 눈앞에 둔 한국 사회는 전체 소득 총량은 상승했지만, 개개인 삶 만족도의 하강속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느냐?’는 항목에서 대한민국은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지수에서 꼴찌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최고의 설교가이자 황금의 입으로 불리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기독교의 가장 완벽한 규칙, 가장 정확한 정의, 최고점은 바로 공동선의 추구다. 왜냐하면 이웃을 돌보는 것만큼 한 사람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공동선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성경 구절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입니다. 바로 그 공동선 질문에 우리나라가 낙제점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영적 지수에서 세계교회 최하위권으로 내려앉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 수준의 휴대전화를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어도, 가장 어려울 때 그 휴대전화로 연락할 대상이 거의 없는 사회와 교회라는 씁쓸한 평가를 받은 셈입니다. 지난 30년간 한국교회는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사실 한국교회 신도 수의 급감보다 더 무섭고 심각한 것은 한국교회의 공동선 지수가 바닥이라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또 두려운 것은 한국교회가 교회의 세속화와 물질주의, 사사화된 신앙과 개교회주의, 교회 간 양극화와 세상과의 소통 부재, 실종된 희년정신, 고삐풀린 자본주의 탐욕에 신음하는 약자들의 탄식을 아직도 제대로 보고 듣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 그리고 한국교회라는 두 배가 같이 통째로 가라앉고 있는데, 갑판 위 호화로운 레스토랑에 있는 대기업과 대형교회들이 저 배 밑창에 있는 수많은 중소 상인들과 교회들과 함께 가라앉을 수 밖에 없는 같은 신세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손 놓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요? 근본으로 돌아가는 데 실마리가 있다고 봅니다. 공동선(Common Good)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익하고 좋은 관계를 만드는 영적 차원과 사람들 사이에 유익하고 좋은 관계를 만드는 사회적 차원이 있습니다. 21세기 교회의 최대 과제는 영성과 공공성을 같이 확보하는 것이며, 그 길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본회퍼 목사의 말대로 교회는 너와 내가 만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곳입니다. 교회는 자기중심적인 정신적 사랑을 걷어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영적 사랑을 채우는 공동체입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에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 영적 사랑이 교환되고, 그 사랑을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하는데 복원의 시작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각 교단은 제도 개혁을 먼저 해야 합니다. 신학교는 신앙과 성품, 실력과 사회적 인격 면에서 기본을 갖춘 학생들을 엄선하는 소수 정예로 과감히 탈피해야 합니다. 준비된 목회자가 목회 현장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며 정성껏 목양할 수 있는 방식이 되도록, 신학교육의 내용과 방식 또한 개혁되어야 합니다. 신학 교수들이 신학생들을 개별적, 인격적으로 돌보며 길러내지 못하는 대량생산 스타일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각 교단도 총회 차원의 결정을 내려 개 교회의 적정 성장과 분립 시점 규모를 (예를 들면 약 500명 내외로) 정해서 교회 공동체성을 보다 강화하고, 모든 지역 교회들이 지역 사회와 긴밀히 연결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상호 성장, 분립, 나눔, 공유, 연대, 참여의 시스템이 될 수 있는 교회 생태계의 대전환을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규모가 큰 교회들은 얼마 전 작고하신 유진 피터슨 목사가 ‘개 교회는 300명이 넘으면 목자와 양의 인격적 관계가 담보된 신앙 공동체로 존재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며 실천했던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분법적 정교분리와 교회 이기주의라는 오래된 상의에 사적 신앙과 정신적 욕망이란 하의만 입고 고집스레 지내던 시절은 이미 끝났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새 예복을 입지 않는가”라는 예수님의 준엄한 물음에 두렵고 떨려야 할 때입니다. 교회와 시민사회의 영성과 공공성에 헌신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으라고 요청하는 후기 세속시대가 이 땅에 상륙 중입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도움받기 가장 힘든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이 땅의 탄식에 그리스도인들은 가슴을 치고 울어야 합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촛대가 움직이기 전에.

*이글은 열매소식지 제267호에 실린 글입니다.

열매소식지 제267호 기사 목록

01 한국 교회의 501년된 종교개혁
02 변하지 않는 복음과 변화하는 세상, 그리고 기윤실의 역할
03 다시 기독교윤리의 과제를 찾는다. 현재글
04 똑똑똑... '자발적불편' 전하러 왔습니다.
05 교회와 함께하는 자발적불편운동 11·12월
06 좋은나무 가짜뉴스 판별법
07 [청년포럼] 우리가 꿈꾸는 노동
08 청년부채 #목소리2
09 공동포럼 '한반도 평화, 기독교 안팎의 과제' 후기
10 사회복지위원회 - 2018년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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